대중투쟁의 길을 열다, ‘30만농민대항쟁’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 30주년 특별기획② 30만농민대항쟁]

  • 입력 2020.07.12 18:00
  • 수정 2020.07.13 09:51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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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1990년 4월 24일 창립돼 올해로 30년간 농민운동의 역사를 일궈왔다. 전농 30년 투쟁사는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이 어떤 길을 걸어 현재에 이르렀는지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전농 창립 그리고 이후 굵직한 역사적 투쟁기록을 매월 1회 연재해 앞으로의 30년을 밝힐 농민운동의 좌표를 확인해 본다.

전농이 창립된 이후 크고 작은 농민대회가 여럿 있었지만 2002년 11월 13일 여의도에서 열린 30만농민대항쟁은 농민운동의 지평을 대중투쟁으로 넓힌 역사적 의미로 남는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 1990년에 창립된 이후 대중적인 농민운동으로 지평을 넓힌 전무후무한 투쟁이 지난 2002년 쌀 개방 반대, 한-칠레 FTA 저지 구호를 외친 11월 13일 ‘30만농민대항쟁’이다. 이날 주최측 추산 13만명의 농민이 여의도에 모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제공
전국농민회총연맹이 1990년에 창립된 이후 대중적인 농민운동으로 지평을 넓힌 전무후무한 투쟁이 지난 2002년 쌀 개방 반대, 한-칠레 FTA 저지 구호를 외친 11월 13일 ‘30만농민대항쟁’이다. 이날 주최측 추산 13만명의 농민이 여의도에 모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제공

 

1990년대는 농산물 수입개방의 굴레가 덧씌워진 시기였다. 농민들이 막아섰던 우루과이라운드(UR) 반대투쟁은 국회비준과 세계무역기구(WTO)이행특별법 제정으로 일단락 됐다. 농업개방이 본격화 되면서 농업계의 구조조정 역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 여파는 200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 4월 전국 농민들의 단일조직으로 출범한 전국농민회총연맹도 농업개방을 위한 숱한 투쟁을 했다. 농업개방을 막기 위한 농민투쟁은 때로 쇠사슬을 목에 걸며 버티기도 했고 최루탄과 몽둥이에 맨 몸으로 나서며 점거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벌어진 농민투쟁은 농민운동 활동가 중심으로 조직됐다. 10년의 헌신적 투쟁은 부분부분 승리를 안겼지만 농산물개방이라는 대세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반면 정부는 포도를 포함한 과수농가를 위협하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까지 강행해 나갔고 쌀 개방 유예 10년이 끝나가던 시기였다. 2004년 쌀 개방을 전제로 정부가 쌀수매제 폐지 방안도 검토하는 불안한 시간들이 이어진 것이다. 이제 쌀까지 전면 개방될 수 있다는 위기가 닥치자 ‘새로운 농민투쟁’에 대한 제안이 나왔다. 전농 3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30만농민대항쟁’이다. 30만명의 농민이 한목소리로 ‘쌀개방 반대’를 외치면 정치권과 정부도 모르쇠로 일관하기 어렵고 이는 곧 쌀 전면개방을 막아낼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설득이었다. 2002년 2월 전농 대의원대회 때 ‘30만농민대항쟁’을 공식적으로 제안한 이가 최재관 당시 여주군농민회 정책실장(전 청와대 농해수비서관)이다.

“쌀개방 반대, 온 국민이 나서면 승산 있다”

20년 전의 역사적인 주장은 어떻게 나온 것인지 묻자 잠시 생각을 고르던 최재관 전 비서관은 “2004년 쌀 전면개방의 위기감이 커지던 때였다. 주식인 쌀까지 수입개방되면 농업·농촌의 몰락은 예견되는 것인데, 2004년에 반대해선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남았을 때 치밀하게 준비하자, 더구나 2002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 대선공약에 ‘쌀 개방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강제하면 반전도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면서 “2001년 겨울 여주군농민회 수련회에서 30만대항쟁 제안을 먼저 했다”고 설명했다.

여주군농민회가 수련회를 갔던 동해바다에서 농민활동가들은 ‘한번 해 보자, 못할 게 뭐 있나’ 의기투합했다. 그 자리를 함께 했고 이후 여주군농민회 30만대항쟁 준비를 착실히 해 냈던 전주영 당시 여주군농민회 사무국장(전 전농 경기도연맹 사무처장)도 “활동가들만의 선도적 투쟁보다는 농민들이 주체가 되는 농민대중 투쟁의 중요성을 항상 얘기하던 게 최 비서관이다. 처음엔 불가능한 얘기란 생각도 했다. 30만명의 농민들이 모인 대대적인 집회를 하려면 각 시·군마다 30명을 태운 관광버스 100대씩 가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주시농민회에서 버스 100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건데, 그때 우리가 집회에 가면 관광버스 2~3대 가는 것도 쉽지 않았으니까 어찌보면 황당한 제안일 수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농민들 속마음엔 쌀개방을 막을 수 있겠냐는 패배주의를 바꿔야 한다는 과제도 분명했다. 전주영 사무처장도 “생각을 바꾸자, 절박한 농민들을 다 모아보면 화력이 폭발적이지 않을까” 동의했고, 최 비서관은 “관광도 가는데, 전국 마을마다 버스 1대씩, 30명씩 탄 버스 1만대 조직을 하자. 서울시내에 1만대의 관광버스가 진입하면 그 싸움은 우리가 이기는 싸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면서 단, 모든 농민들에게 농업문제를 알리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모았다. 1년을 준비하면 더한 일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여주시농민회는 곧 30만농민대항쟁 성사를 위한 활동에 돌입했고, 그해 2월 전농 대의원대회에서 최재관 비서관이 30만농민대항쟁을 공식 제안했다.

농민들 있는 곳 어디든 교육의 장

당시 전농은 정현찬 의장(현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위원장)과 박흥식 사무총장(현 전농 의장), 강병기 정책위원장(현 전농 부의장) 체제였다. 대의원대회에서 제안된 30만대항쟁의 본격 준비는 내부 논의를 거쳐 4~5월경부터 시작됐다.

마을간담회, 이장협의회, 농민이 있는 곳이라면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교육을 시작했다. 농업이 처해 있는 현실, 농산물 개방이 가져올 위기, 쌀 개방의 문제를 설명했고, 11월 13일 30만대항쟁에 다 같이 서울로 가자고 결의했다.

여주시는 그야말로 마을 곳곳이 30만대항쟁 홍보장으로 변신했다. 마을마다 현수막이 걸리고, 전봇대엔 11월 13일 30만 농민이 모이는 서울집회 안내 전단이 붙었다. 지금처럼 업체에서 매끈하게 제작하는 현수막이 아니라 농민들이 천을 끊어다가 공설운동장에 걸어놓고 손으로 한글자 한글자 써서 만들어 걸었다. 쌀개방 반대 서명운동도 동시에 진행하면서 차츰차츰 분위기가 고조돼 갔다.

최재관 비서관은 “농민회원들이 진짜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5가구에 1가구는 쌀개방 반대 서명을 받아낼 정도로 집중했다. 농민회라면 ‘빨갱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던 보수적인 사람들도 너도나도 11월 집회참여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최 비서관은 지금처럼 스마트폰 소통이 없던 그 시절, 전농 홈페이지 게시판에 지역의 활동 소식을 꾸준히 올렸다. 게시판에 가장 글을 많이 올린 활동가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2002년 관광버스 1대를 빌리려면 20만원이 들었다. 여주에서 100대가 가려면 2,000만원이 필요했다. 봄부터 30만대항쟁 준비를 해 오던 여주시농민회는 여름에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후원주점을 열었고, 목표금액을 모으는 데도 거뜬히 성공했다. 마을에 30만농민대항쟁 분위기가 단단하게 자리잡을수록 행정의 방해공작도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여주의 어느 지역은 관이 주도한 이장단해외여행을 대회 전날인 11월 12일 출국일정으로 잡은 것이다. 하지만 2~3대의 관광버스로 집회에 참석하던 여주시농민회는 11월 13일 30만대항쟁에 102대의 차에 농민들을 가득 태우고 여의도로 향했다.

30만농민대항쟁의 주인공은 이날 전국 곳곳에서 새벽부터 서울로 향했던 13만명의 농민들이다. 하지만 전국농민회총연맹 지도부와 전국 농민활동가들의 헌신이 대회를 성사시켰다. 사진 왼쪽부터 박흥식 당시 전농 사무총장, 강병기 당시 전농 정책위원장, 최재관 당시 여주군농민회 정책실장, 전주영 당시 여주군농민회 사무국장, 이진구 당시 부여군농민회 사무국장, 이근혁 당시 부여군농민회 홍산면지회준비위 사무장.
30만농민대항쟁의 주인공은 이날 전국 곳곳에서 새벽부터 서울로 향했던 13만명의 농민들이다. 하지만 전국농민회총연맹 지도부와 전국 농민활동가들의 헌신이 대회를 성사시켰다. 사진 왼쪽부터 박흥식 당시 전농 사무총장, 강병기 당시 전농 정책위원장, 최재관 당시 여주군농민회 정책실장, 전주영 당시 여주군농민회 사무국장, 이진구 당시 부여군농민회 사무국장, 이근혁 당시 부여군농민회 홍산면지회준비위 사무장.


밤새 대회준비 회의하고 새벽 귀가길에 농사지어

충남 부여도 30만농민대항쟁을 준비하며 전열을 가다듬긴 마찬가지였다. 당시 부여군농민회 사무국장이었던 농민 이진구씨도 부여군에서만 3,000명 농민참여를 목표로 삼아 밤낮없이 바빴다. 처음으로 마을마다 간담회를 하러 다니고 면단위 이장들을 찾아다니면서 쌀개방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렸다.

처음엔 귀담아 듣지 않던 이장들이 하나둘 관심을 보이자 분위기 전환은 시간문제였다. 지역의 정당들도 돕겠다고 나설 정도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이진구씨는 “농민회도 없던 지역에서 당시 여당측에서 버스 3대를 책임지겠다고 말할 정도였다”면서 “농민들에게 한-칠레 FTA는 곧 한-미 FTA라고 설명했고, 대규모로 농사짓는 미국농민들을 우리가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비용을 마련하는 일도 농민회에겐 과제였는데, 10월 백제문화제에서 농민대회 후원 주점을 열기로 했다. 그날 대회가 성공하겠구나, 예감했었다. 후원주점에 사람들이 그야말로 벌떼처럼 몰려들었다”고 생생하게 기억했다.

당시 홍산면지회 준비위원회 사무장이었던 이근혁 전 전농 충남도연맹 사무처장은 헌신적으로 활동한 농민으로 타지역에서도 손꼽을 정도였다. 이 전 사무처장은 “서울에서 농민대회를 하면 보통 3대, 많아야 8대가 움직이던 부여군에서 30만대항쟁 때는 52대의 버스가 출발했다”고 벅찬 기억을 꺼냈다.

준비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이후 부여읍지회도 창립하고 농민동지들이 뜻을 다시 모으는 기폭제가 됐다.

김포공항 근처에 내렸던 회원들과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로 향한 이진구씨는 농민대회장 입구의 가득한 농민들을 보고 “이게 해방이구나” 감탄했다고 한다.

이씨는 “그때 모인 농민들이 여세를 몰아 정부를 대차게 몰아붙이는 싸움을 했더라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여한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친환경 농사짓는다고 농장이 풀밭이었다. 밤새 회의하고 점검하다가 새벽에 집에 들어가면서 논밭에 들러 일하던 게 기억난다. 밤낮없이 뛰어다니던 시절이었는데, 동네사람들이 좋은 일한다고 잘 봐주셨던 기억도 난다”면서 “수세싸움을 해서 수세를 없앴던 게 농민회였고 세금도 바로잡는 게 농민회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싸우면 이긴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했다. 50여대의 버스가 줄지어 출발하던 그때, 일 년을 준비해왔던 만감이 교차해 회원들 대부분 울었다면서 “10만이 넘는 농민들이 크게 싸우지 못했던 게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11월 13일 여의도, 13만 농민이 모이다

전국에서 30만대항쟁 준비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농 지도부도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집회날짜인 11월 13일도 ‘전태일열사’ 기일로 택했다. 농민과 노동자가 함께 하자는 의미가 있는 택일이다. 전농이 11월 13일 서울 여의도에 집회신고를 내자 서울시와 경찰청은 난색을 하며 반려했다. 서울에 1만대의 관광버스가 진입하면 그야말로 서울이 마비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박흥식 전농 의장은 “그때까지 농민대회 최다인원은 3만명이었다. 쌀 개방과 한-칠레 FTA가 동시에 압박하는 상황에 100만 농민항쟁은 아니더라도 최다인원 3만명의 10배는 모여보자는 결의가 생겼고, 전국 각지에서 서울 여의도로 집결하게 되면 서울시 교통이 마비될 것이란 우려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전농이 낸 대안이 분산 정차였다”고 설명했다. 여의도에는 최대 350대 주차만 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차량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여의도 인근과 수도권으로 하차지점을 지역별로 나누고 농민들은 도보나 지하철로 집회장소로 이동하는 계획이었다. 서울시 마비를 방지할 대안을 브리핑한 끝에 마침내 집회허가가 났다.

차량진입과 이동은 서울 경찰청이 맡고, 멀리서 집회장으로 오는 농민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지하철공사와 협의해 여의도까지 무임승차도 결정됐다.

박 의장은 “전국 농민들이 농민운동사의 새 역사를 쓴 현장이었다. 김포공항 근처에 내린 충남지역 농민들이 지하철 칸칸마다 가득 탔고, 농민가를 부르며 여의도로 향했다. 농민대회가 시작되는 2시 무렵엔 농민행렬이 끝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전농 정책위원장이었던 강병기 전농 부의장은 “지하철을 타고 무사히 집회장으로 들어오는 경북도연맹 소속 농민들을 보니 눈물이 났다. 경남 진주에서는 무려 162대의 버스가 새벽에 서울로 출발했다. 주최측 추산 13만명의 농민들이 쌀개방 반대를 외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진주는 마을이 텅 비었다는 말도 들렸고, 농사일 틈틈이 할매들 있는 곳마다 찾아다녔던 농민활동가들도 대회를 성사시켰다는 감격에 눈물을 흘렸다”고 당시를 전했다.

박흥식 의장은 “사고 없이 전무후무한 농민대회가 치러진 데에는 진보단체, 한국대학생총연합 학생들의 자원봉사도 한 몫했다. 그날 대회는 명칭은 농민대회였지만 농업문제에 발벗고 나선 시민사회 진보진영의 집합이었다”고 덧붙였다. 박 의장은 그날 대회에 전북 김제에서 부모님이 참석하셨지만,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서 대회를 진행하느라 인사도 못했다고 한다.

이날 농민대회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권영길 후보와 노무현 후보, 정몽준 후보가 참석했다. 이회창 후보측은 경호 문제로 전농 지도부와 이견이 있어서 불참을 통보했다가 전국, 특히 경상남북도가 들썩들썩 해진 농민대항쟁의 위상에 뒤늦게 ‘인사라도 하게 해 달라’고 의사타진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경상남북도의 농민들이 대거 서울에 왔는데 이회창 후보가 대회에 오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괘씸죄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박 의장은 그날 사회를 보면서 ‘우리 농업에 대한 절박한 표출이자, 위기의식이 이만큼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날 30만농민대항쟁은 농민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활동가 중심의 투쟁을 농민 대중투쟁으로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후 2003년 농민 투쟁은 물론, 2004년 한-칠레 FTA 저지, 2005년 홍콩원정투쟁까지의 밑불이 됐다.

여의도 농민대회에 참석한 뒤 마을 분위기도 싹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에 대항하는 것이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으로 치부되던 농민회 활동은 ‘한다면 하는 믿음직한 사람들’로 통했다. 술자리에서 ‘내가 서울로 농민대회 갔던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단골 안주가 됐다.

박 의장은 30만대항쟁을 치를 수밖에 없던 농민들의 절박한 상황은 예나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뼈아프다는 말을 남겼다.

“2000년에 오렌지 수입이 시작되면서, LG가 오렌지 5개를 1,000원에 팔았다. 가격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상황이 되니 농업이 절단 났다. 2000년과 2001년 시설하우스에 빨간딱지는 유행처럼 붙었다. 농사지어서 빚을 갚지 못하는 농민들에게 정부는 빚독촉을 하다 압류딱지를 붙인 것이다. 그때 끝끝내 막지 못한 FTA가 지금 53개국과 그물처럼 얽혔다. 그렇게 반대하던 수입개방이 이제 쌀까지 전면개방된 전성기를 맞고 있다. 반면 농업과 농촌, 농민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어서 이제 물러설 곳도 없어졌다. 30만명이 다시 모일 만큼 농민 숫자는 없지만 전 농민이 모여서 다시 역사를 써야 할 절박한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30만농민대항쟁을 기억하는 농민들은 그때 더 몰아붙였어야 했다는 아쉬움으로 가슴 속에 날을 벼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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