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농, 반세계화 운동 선봉에 서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 30주년 특별기획 ④반세계화 운동]

  • 입력 2020.09.13 18:00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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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1990년 4월 24일 창립돼 올해로 30년간 농민운동의 역사를 일궈왔다. 전농 30년 투쟁사는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이 어떤 길을 걸어 현재에 이르렀는지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전농 창립 그리고 이후 굵직한 역사적 투쟁기록을 매월 1회 연재해 앞으로의 30년을 밝힐 농민운동의 좌표를 확인해 본다.

전농은 국내 농업문제에 가장 앞장서 투쟁해 온 농민조직이지만 농업파괴를 몰고 올 개방농정에도 적극적인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2000년대 전농은 국경을 넘어 해외원정투쟁도 불사했는데 2003년 멕시코 칸쿤 투쟁과 2005년 홍콩투쟁, 2013년 인도네시아 발리투쟁 등을 통해 전 세계 농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9월 10일은 전 세계 소농들이 참여해 ‘반세계화 투쟁’을 결의하는 ‘국제행동의 날’이다. 이 날은 지난 2003년 9월 10일 멕시코 칸쿤에서 개최된 WTO 제5차 각료회의 저지를 위해 각국 농민단체들이 모여든 날, 각료회의장 울타리 앞에서 “WTO KILLS FARMER(WTO가 농민을 죽인다)”를 외치고 자결한 한국농민 이경해씨를 추모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세계 농민단체 ‘비아캄페시나’는 올해도 WTO 및 FTA를 반대하는 국제행동의 날을 맞아 아시아·아프리카·유럽·미주 지역 농민들과 WTO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유무역협상에서 왜 농업이 제외돼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는 행동을 펼쳤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도 여기에 함께 했다.

전농의 반세계화 운동 역사는 1994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농은 ‘국제농업생산자연맹’에 가입해 터키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자를 파견하는 등 농민운동의 지평을 넓혀갔다. 우루과이라운드(UR) 투쟁을 시작하면서 농업문제가 국내 이슈에서 해외 이슈로 확산된 것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국제농업생산자연맹이 대농·기업농 위주로 활동하면서 이후 반세계화와 지속가능한 농업을 추구하는 중소농민 주축 조직, 비아캄페시나와 연대활동을 벌여나갔다.

지난 2005년 12월 15일 전농은 제6차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해 홍콩 현지에서 삼보일배 투쟁을 벌여 전 세계 농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전국농민회총연맹 제공
지난 2005년 12월 15일 전농은 제6차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해 홍콩 현지에서 삼보일배 투쟁을 벌여 전 세계 농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전국농민회총연맹 제공

 

2001년 브라질 세계사회포럼, 반세계화 흐름 확인

전 세계 농민들이 반세계화 운동으로 똘똘 뭉친 때는 1999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제3차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이었다. 전 세계 시민사회단체가 시애틀 각료회의장 부근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여 개막식조차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말았다.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지배층의 일방적인 여론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자본주의 본고장 미국에서 미국 농민들까지 참여한 반세계화 투쟁은 전농을 비롯한 국내 농업계 입장에선 놀라우면서도 희망적인 현장이 됐다. 이른바 시애틀투쟁을 기점으로 반세계화 투쟁은 더욱 달아올랐다. 전농도 국제연대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하게 된 시기다.

국내에선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해외 연대에 앞장 서 있었다. 2001년 민주노총을 통해 1월 브라질에서 개최될 ‘세계사회포럼’에 한국 농민단체가 참석했으면 한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전농은 이종화 정책위원장 직무대행을 제1회 세계사회포럼에 파견했다.

전농 광주전남연맹 화순군농민회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종화 당시 정책위원장 직무대행은 “50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에 갔었다. WTO 반대투쟁이나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을 국내에서만 해 왔던 전농이 세계 농민단체들과 연대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세계사회포럼 참석이었다”고 아주 오래된 기억을 꺼냈다.

이어 “국내 투쟁만 하던 전농 입장에서 전 세계 움직임을 잘 모르던 시기이기도 했다. 직접 가보니 다양한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낯설고 말도 안 통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덧붙였다.

세계사회포럼 참석을 통해 비아캄페시나라는 세계 농민단체 조직의 존재도 알게 됐다. 이는 전농의 존재를 비아캄페시나를 비롯한 세계 농민들에게 알리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종화씨는 “농민들이 개방농정을 반대하고 WTO 반대, FTA 반대 투쟁을 쉼 없이 해 왔지만, 그 본질은 거대 다국적기업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국제기구의 실상을 드러내는 투쟁이다. WTO를 해체시키지 않는 한 우리농업의 살 길이 없다, 는 것이 하나의 명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한국농민들, 멕시코 칸쿤서 세계를 놀라게 하다

제5차 WTO 각료회의는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렸다. 전농은 각료회의 저지를 위해 60여명 규모의 해외 원정 투쟁을 결의했다. 선발대 10명, 나머지는 후발대로 참석하는 등 준비에도 만전을 기했다.

칸쿤 현지에서 전 세계 공동투쟁단을 구성했는데, 전농과 전여농이 제일 많았다. 칸쿤 농민투쟁을 총괄했던 이가 전기환 당시 정책위원장(현 춘천농민회장)이다.

전기환 회장은 “한국에서 민중투쟁단을 조직했는데 그 대표를 정광훈 의장이 맡았고, 농민투쟁단 대표는 정현찬 의장(현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맡았다. 전농과 전여농은 민중투쟁단, 농민투쟁단 가릴 것 없이 모두 참여했다. 그런데 각료회의 저지를 위해 세계농민대회를 하는 과정에 이경해 열사가 자결을 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세계농민대회는 이후 이경해 열사 추모제로 급히 전환됐고, WTO 각료회의 저지 운동은 폭발적으로 커졌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결국 제5차 WTO 각료회의도 무산됐다.

전기환 회장은 “칸쿤에서 비아와 처음 결합해서 투쟁한 것이었는데, 한국 농민들의 전투력은 상당한 화제가 됐다. 물론 이경해 열사 자결 사건이 WTO 반대전선에 분노를 키우는 밑불이 됐지만, 한국 농민투쟁단의 거침없는 투쟁력은 두고두고 회자됐다”고 설명했다.

국내도 충격에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칸쿤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전농은 이경해 열사 장례준비를 해나가면서 비통해 했다. 워낙 국제적 이슈로 불거진 이 사건으로, 정부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박흥식 당시 전농 사무총장(현 전농 의장)은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와 장례에 대해 면밀히 논의했는데, 농식품부의 물밑 저지가 극심했다. 결국 전농은 전남지역 한농연 조직과 또 이경해 열사 유가족과 노제 형태의 장례를 엄숙하게 치렀다”고 말했다.

홍콩투쟁, 1천명 농민 해외원정투쟁의 길 나서

2005년 12월 12일 농민 1,000여명이 홍콩으로 대거 이동했다. 전무후무한 대규모 농민들이 제6차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에 나선 것이다. 칸쿤투쟁이 전농을 세계 농민들에게 알린 시작이었다면, 홍콩투쟁은 전농의 위상을 드높인 현장이었다. 대규모 농민투쟁단 파견을 위해 전농은 1년 전부터 준비를 해 나갔다.

전농에서 참석한 농민투쟁단 규모만 840여명이었다. <전농 20년사>에서는 “전농은 홍콩투쟁 준비과정에서 조직 내부 논의 뿐 아니라 국내외적으로 투쟁주체가 돼 혼신의 힘을 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농민단체 뿐 아니라 민주노총에 홍콩투쟁의 중요성을 알리면서 한국투쟁단을 조직해 나갔다.

전기환 회장은 “칸쿤투쟁이 격한 투쟁이었던 데 반해 홍콩투쟁은 비폭력투쟁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서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투쟁방식으로 택한 게 삼보일배였다”고 설명했다.

농민투쟁단은 매일 저녁 홍콩시내 빅토리아 공원 주변에서 ‘WTO반대’를 외쳤고, 홍콩 시민들에게 WTO의 문제를 알리는 촛불집회를 열었다. 각료회의가 열리는 12월 15일에는 빅토리아 공원부터 각료회의장인 컨벤션센터 앞까지 삼보일배를 했다.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반세계화 투쟁을 실천하는 한국농민들에게 찬사가 쏟아졌다. 농민들은 해상시위도 벌였는데, 회의장 인근 바다에 100여명의 투쟁단이 뛰어들어 ‘다운! 다운! 떠블유티오(DOWN DOWN WTO)’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홍콩에서 열린 제6차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해 100여명의 투쟁단은 회의장 인근 바다에 뛰어들어 ‘다운! 다운! 떠블유티오(DOWN DOWN WTO)’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제공
홍콩에서 열린 제6차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해 100여명의 투쟁단은 회의장 인근 바다에 뛰어들어 ‘다운! 다운! 떠블유티오(DOWN DOWN WTO)’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제공

 

인도네시아 발리투쟁, 100번의 절에 담은 농민들의 염원

2013년 12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9차 WTO 각료회의장 앞에도 한국 농민들의 ‘NO WTO’ 구호가 울려 퍼졌다. 40여명의 농민투쟁단은 발리 집회장 인근에서 상복을 입고 행진에 앞장서기도 했고 풍물로 기운을 북돋기도 했다. 박흥식 의장은 발리 집회에 상여를 등장시킨 장본인이다. 집회장 주변 대나무를 엮고 한국서 가지고 간 꽃으로 상여장식을 해 가두투쟁을 이끌었다.

발리농민투쟁단은 기자회견을 열고 메시지도 전달했는데 △농업은 상품이 아닌 생명이고 △모든 사람들의 식량주권이 실현되는 농업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WTO의 종말만이 살길’이라는 점을 알려냈다.

하지만 관광지 발리에서의 투쟁은 철통같은 보안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경해 열사 추모제를 통해 농민들의 심경을 전달했고,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도 100번의 절을 하는 100배 투쟁을 전개해 주변을 숙연하게 했다.

비아캄페시나·일본 노민렌 등 국경 넘나드는 교류

비아캄페시나에서 한국농민단체의 가입을 제안했고 전농은 2004년 대의원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정식가입을 결정했다. 전농과 전여농 모두 비아에 정식 단체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지역위원(ICC) 중 여성대표가 공석인 터라 윤금순 당시 전여농 회장에게 요청이 들어왔다. 윤 회장은 숙의 끝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동남동아시아 ICC 여성대표로 활동했다.

이후 전농은 비아캄페시나 총회, 동남동아시아 ICC 회의, 청년총회 등에 회원조직으로 적극 참여했다. 일회적인 원정투쟁에서 일상적인 국제연대로 발전시킨 것이다. 전농은 또한 비아캄페시나 조직을 초청해 한국농업의 현실을 알리는 데도 노력했다.

윤금순 회장은 “세계가 단일 무역질서로 획일화 되면서,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식물 종만 해도 다국적 종자기업 주도로 수천종이나 심어지던 옥수수가 하나의 종자로 획일화 된 것처럼. 다국적 기업들의 이윤추구로 세계가 지배되고 권력구조가 재편되는 과정이 진행됐다”면서 “그걸 막자는 게 반세계화 운동이고, 가장 폐해가 큰 농민들이 국경을 초월해 뭉치게 됐다”고 연대투쟁 의미를 설명했다.

비아캄페시나와의 연대활동으로 한국의 농민들 실태도 세계에 전파됐다. 사실 한국은 잘사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고 미국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라는 선입견이 있던 터였다. 그런 잘사는 나라의 농민들이 왜 반세계화 투쟁을 하는지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다.

전기환 회장은 “한국정부는 WTO 체제를 적극 찬성하고 있는데, 왜 한국 농민들은 WTO를 반대하는지 의아해 했다. 그래서 수입개방에 의해 우리 농업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농민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공유하면서 농업의 특수성을 이해시켰다”고 말했다.

일본의 농민단체 노민렌과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2005년 일본의 진보적 민중운동단체가 한국을 방문해 노동운동단체와 농민운동단체를 순회 강연하는 일정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운동진영이 전농에게 일본 순회강의를 요청한 것이 출발점이 됐다. 2008년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지역회의에서 한·일 양국의 농민들이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정기적인 교류 및 투쟁에 대해 구체적 논의를 했다. 현재는 뜸하지만 전농과 노민렌의 교류는 2019년까지 이어졌다.

2013년 12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9차 WTO 각료회의장 앞에도 한국 농민들의 ‘NO WTO’ 구호가 울려퍼졌다. 한국농민투쟁단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WTO 반대를 외치며 자결한 이경해 열사 추모제를 발리 현지에서 열고 고인의 뜻을 기렸다. 홍기원 기자
2013년 12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9차 WTO 각료회의장 앞에도 한국 농민들의 ‘NO WTO’ 구호가 울려퍼졌다. 한국농민투쟁단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WTO 반대를 외치며 자결한 이경해 열사 추모제를 발리 현지에서 열고 고인의 뜻을 기렸다. 홍기원 기자

 

여전한 세계화의 굴레

전기환 춘천농민회장은 당시 전농 정책위원장으로 2003년 멕시코 칸쿤 투쟁에 농민투쟁단을 총괄하고 비아캄페시나와 연대활동을 벌이는 등 반세계화 운동의 중심에 섰던 대표 활동가다.
전기환 춘천농민회장은 당시 전농 정책위원장으로 2003년 멕시코 칸쿤 투쟁에 농민투쟁단을 총괄하고 비아캄페시나와 연대활동을 벌이는 등 반세계화 운동의 중심에 섰던 대표 활동가다.

한-칠레 FTA 반대 투쟁이 한참이던 2002년, 당시 전농 사무총장이었던 박흥식 의장이 “칠레의 농업현장을 직접 가보자”고 제안해 농협 및 농민단체 관계자들과 해외현지답사 길에 올랐다. 다국적 기업 소유의 포도농장은 규모가 3,200ha에 사장만 5명으로, 거대함이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용노동자만 3만명이라고 들었다. 더구나 포도농장주인 다국적 기업은 사실상 미국의 거대자본이 주축이기 때문에 미국자본이 키운 체급이 다른 포도와 한국 포도가 ‘불공정한 자율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

박 의장은 “국내 대기업 칠레지사 관계자들과도 간담회를 했는데, 우리나라가 칠레와 FTA를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왜냐면 그때 당시 칠레 관세가 7%였는데 무역확대를 목표로 매년 1% 관세를 낮추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 계산만 해도 6년 후에 관세가 제로가 되는데, 구태여 우리나라가 피해산업이 발생할 게 뻔한 FTA를 맺을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FTA가 체결된다 해도 우리나라 수출품으로 공략할 칠레 시장이 그리 크지 않다는 설명도 했다. 다만 농업분야의 피해는 너무나 분명하다고 우려했다”고 증언했다.

칠레 외교부 장관과도 우연히 마주하게 됐는데, 박 의장은 “그가 언론보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속마음을 털어놨다. 한국과의 FTA는 관심 사안이 아닌데 한국이 요구하기 때문에 응하는 것뿐이며, 협상을 하는 동안 한국이 국내적인 준비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조언까지 들었을 때, 함께 간 농민단체 관계자들이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얻을 것 없고 잃을 것만 있는 한-칠레 FTA와 관련한 뼈아픈 기억이다”고 덧붙였다.

전농이 반세계화 운동을 벌인 지 30여년 세월이 지났다. 전기환 회장은 춘천에서 담배·고추·오이 등 밭농사를 많이 했지만 그사이 다 정리하고 한우사육에만 전념하고 있다. 2000년대만 해도 중소 한우농가들이 많았으나 수입개방이 전면화 되면서 지금은 규모 있는 농민만 겨우 버티고 있다고 실태를 전했다.

박흥식 의장도 2000년대 초반 농산물 수입개방이 확대되던 시절, 빚을 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논농사만 짓기 시작했다. 김제지역 농가수가 딱 절반으로 줄었던 세계화의 폐해를 누구보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농민들의 가열찬 반세계화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나라는 FTA체결 선진국이 됐다. 2004년 4월 발효된 한-칠레 FTA를 시작으로 동시다발로 추진한 결과 55개국과 FTA가 발효돼 있다. 그 여파로 농업소득은 수년째 1,000만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더구나 선진국들이 자유무역보다 보호무역주의로 선회하고 있는 2020년에도 아직 한국의 농정기조는 30년째 자유무역 맹신주의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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