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의 후예들, 적폐정권 무너뜨리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 30주년 특별기획(최종)_ 전봉준투쟁단]

  • 입력 2020.11.14 01:40
  • 수정 2020.11.14 01:47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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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1990년 4월 24일 창립돼 올해로 30년간 농민운동의 역사를 일궈왔다. 전농 30년 투쟁사는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이 어떤 길을 걸어 현재에 이르렀는지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전농 창립 그리고 이후 굵직한 역사적 투쟁기록을 매월 1회 연재해, 앞으로의 30년을 밝힐 농민운동의 좌표를 확인해 봤다.

이제 그 마지막, 전봉준투쟁단의 역사를 적는다. 2015년 민중총궐기대회에서 살인무기가 된 물대포에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날, 응집된 농민들의 분노가 전봉준투쟁단을 탄생시켰고, 결국 적폐정권 위에 새 역사를 썼다. 전국농민회총연맹 30년 역사상 가장 많은 국민들의 응원을 받은 벅찬 투쟁이었다.

2016년 11월 15일 전남 해남에서 ‘농정파탄! 국정농단! 박근혜 퇴진! 가자 청와대로! 농기계 투쟁 출정식'을 갖고 출발한 ‘전봉준 투쟁단' 소속 농민들이 행진 4일째인 18일 수십여대의 트랙터를 앞세우고 전북 정읍시의 각 면 소재지를 순회하며 서울로 상경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2016년 11월 15일 전남 해남에서 ‘농정파탄! 국정농단! 박근혜 퇴진! 가자 청와대로! 농기계 투쟁 출정식'을 갖고 출발한 ‘전봉준 투쟁단' 소속 농민들이 행진 4일째인 18일 수십여대의 트랙터를 앞세우고 전북 정읍시의 각 면 소재지를 순회하며 서울로 상경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2015년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는 이명박정권 5년과 박근혜정권 3년을 거치면서 임계점에 달한 민심의 폭발이었다. 온 국민을 충격과 비통함에 젖게 했던 세월호 사태와 역사를 왜곡하는 국정교과서 문제, 쌀값 폭락까지 총체적 난국을 헤쳐 나갈 탈출구가 필요했고, 전국농민회총연맹 지도부(김영호 의장, 조병옥 사무총장, 박형대 정책위원장)는 밤마다 토론한 끝에 민주노총과 농민이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 결실이 13만 민중총궐기였다.

하지만 그날 전남 보성에서 올라온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조준 사격한 고압물대포에 의식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다.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백남기 농민이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한 317일 동안, 병원 앞에는 매일 촛불이 켜졌다.

광주활동가 토론회, 민중총궐기 이후를 고민

2016년 11월 6일,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이 치러진 뒤 광주광역시에서는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긴급 활동가 토론회가 개최됐다. 일주일 뒤 또 다시 ‘백만’ 민중총궐기대회(12일)가 계획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토론회에 대해 박형대 당시 전농 정책위원장은 “이미 정세는 백만, 이백만 이런 참석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모든 국민들이 나설 수밖에 없는 사회분위기 속에, 농민들이 얼마나 참여할 것인가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박근혜정권 퇴진을 위해 민중총궐기 그 이후를 준비하는 것, 이 시대 농민들의 소명을 다 하기 위한 다음 전략회의였다.

김영호 전농 의장은 농민들이 갖고 있는 게 농기계니 농기계를 앞세워 투쟁하자고 제안했다. 투쟁단 이름도 ‘백남기투쟁단’과 ‘전봉준투쟁단’ 등이 거론되다가 최종결정된 것이 ‘전봉준투쟁단’이었다.

이제 농민들은 농기계를 동원해 밀고나가고,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맞서자는 민중투쟁 계획이 섰다. 그러나 노동자 총파업 선언은 예상보다 위력적이지 않았다. 11월 12일 민중총궐기대회에 대형 상여가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등장했다. ‘쌀값대책’을 요구했던 70대 노인 백남기 농민을 떠나보낸 농민들의 분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전봉준투쟁단, ‘해남’과 ‘진주’서 출정

민중총궐기가 끝나자마자 15일 전남 해남에서 ‘전봉준투쟁단’의 서군(대장 이효신)이 대장트랙터를 앞세워 기세등등 출정식을 했다. 다음날 경남 진주에서 동군(대장 최상은)도 서울을 향해 출발을 알렸다. 경기도 안성에서 단일대오를 갖추기로 한 일정이었다.

동·서군 전봉준투쟁단은 거점 지역마다 ‘쌀값폭락, 농정파탄, 박근혜정권 퇴진’ 시국선언, 기자회견 그리고 지역 농민들과 정세토론을 하면서 서울을 향했다.

최상은 당시 동군 대장은 “보수성향이 강한 경남·북, 충북이 우리 경로였다. 짐작하듯 처음부터 동력이 확 붙지는 않았다. 그러다 경북 성주지역에 도착하니 사드투쟁단이 열렬히 환호해 준 기억이 난다. 대규모 환대에 모처럼 힘을 충전했다”면서 “그러다 경기도에 진입하면서 열기가 체감됐다. 우리가 큰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고 회상했다.

박형대 당시 전농 정책위원장은 “대장트랙터를 앞세운 서군의 진용은 강력한 이미지로 각인됐다. 특히 전북 정읍과 고창, 동학농민운동 전적지를 지날 때가 국민적 관심이 폭발했다”고 설명했다. 거리마다 손을 흔들어 환영하고 격려하는 인파들이 셀 수 없었다.

감당하기 벅찬 국민적 관심, 안성 투쟁

박형대 전 정책위원장은 “경기도 안성부터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전봉준투쟁단에 국민적 관심이 쏟아졌다. 그때부터 서울까지의 투쟁상황은 전국 상황판을 그려야 할 만큼 규모가 확대됐다. 경기도 안성에서 동군과 서군이 결합하자 경찰병력이 급격히 두터워졌고, 이를 뚫고 나온 일부 농민투쟁단과 트랙터 행렬은 서울 양재동 길목에서 한바탕 대치국면이 펼쳐졌다. 나는 서울행정법원에 가서 농민들의 평화집회를 막아선 공권력이 불법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싸움을 해야 했다. 결국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농민들의 상경투쟁이 합법이라는 손을 들어줄 만큼, 사회적 관심도 컸지만 그만큼 어수선한 상황이 됐다. 놀라운 건 이 어수선함과 꼼꼼한 지휘가 부족한 데도 전봉준투쟁단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사고 없이 경찰 봉쇄선을 뚫고 서울 양재나들목까지 대오를 갖췄다”고 당시를 전했다. 그러나 또다시 길목은 경찰저지선에 가로막혔다.

격렬한 몸싸움이 나던 중 전봉준투쟁단 총대장인 김영호 의장이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얼굴에 시뻘건 두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이 장면은 당시 SNS를 타고 전국에 삽시간에 퍼졌다. 페이스북 댓글 창에는 “시속 15킬로미터로 2주 동안 달려오셨다고 들었다. 마음 찡하다”, “오늘 먹은 밥이 누구 손에서 만들어진 건지 생각해봐라…오늘 피 흘리는 분들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글이 꼬리를 물었고, 십시일반 투쟁기금에 크고 작은 물품들이 곳곳에서 쏟아져 왔다.

박형대 전 정책위원장은 “국민들이 엄청난 성금을 보내줘서 재정적으로 풍성한 투쟁을 했다. 그보다 국민들이 전적으로 호응해준다는 것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면서 “당시엔 내가 봐도 농민들 눈빛이 무서울 정도였다. 기세에 눌려 공권력이 슬슬 빠질 정도였다”고 경험담도 들려줬다.

2016년 11월 26일 서울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농민대회 봉쇄 폭력경찰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농민 결의대회’에서 발언중인 이효신 전봉준투쟁단 서군 대장. 오른쪽은 최상은 동군 대장.  한승호 기자
2016년 11월 26일 서울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농민대회 봉쇄 폭력경찰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농민 결의대회’에서 발언중인 이효신 전봉준투쟁단 서군 대장. 오른쪽은 최상은 동군 대장. 한승호 기자

 

가자, 청와대로

1차 전봉준투쟁단의 상경길이 평택에서 일단락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농민들은 전열을 정비해 2차 상경길에 나섰다. 평택이 출발점이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대장트랙터가 도착할 때까지 또다시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병력도 여러 겹 한층 두터워졌고, 서울과 경기도 경계선에서 또다시 뒤엉켰다. 이제는 서울시민들도 길을 막고 있는 경찰들에게 물을 뿌릴 정도로 민심은 전봉준투쟁단과 하나가 됐다. 대장트랙터를 뒤따르는 농민들은 지역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내려서 경찰과 대치하고 또 이동하고를 반복했다. 박형대 전 정책위원장도 대열에 합류했다가 관광버스를 놓쳤다. 그때 택시 한 대가 서울행을 자처했다. 공짜택시를 얻어 타고 대장트랙터 뒤를 밟아 가는데, 이효신 서군 대장의 트랙터 운전 실력에 감탄 또 감탄을 했다고 한다. 육중한 트랙터가 도심 한복판의 평상시 도로를 달리는 것도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닌데, 경찰력이 따라붙어 방해하고 주변 일반차량들까지 뒤엉켜 있는 틈새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나갔다. 박형대 전 정책위원장은 “대장트랙터를 운전하는 이효신 서군 대장, 짐칸에는 3~4명의 농민들이 경찰을 차단하고, 이대종 현 전농 전북도연맹 의장이 카메라로 현장을 담고 있는 모습을 뒤에서 고스란히 지켜봤다”고 전했다. 또 한 사람의 활약이 있었는데, 최석환 전농 대외협력부장은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이효신 서군 대장이 타고 있는 트랙터를 호위했다. 그런데 어찌나 운전 실력이 귀신같고 겁이 없던지 박 정책위원장은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고 표현했다. 최석환 부장이 대장트랙터를 ‘예술적’으로 호위했기에 이효신 서군 대장도 운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여의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며 두 사람의 기막힌 호흡도 잊지 못할 얘깃거리로 남겼다.

여의도가 코앞인 상황, 또 길이 막혔으나 결국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다.

트랙터를 여의도에 모이게 하는 전략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혹시 대장트랙터가 봉쇄될 것을 우려해 제2, 제3 등 여러 대의 트랙터를 여의도 인근에 배치했었다. 물론 대부분 국회 앞에 닿지 못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될 때, 최후의 카드로 준비했던 탑차 속에서 소형 트랙터가 등장했다. 국회 앞 집회 인파들의 환호 속에 김영호 의장은 트랙터 위로 올라서서 ‘승리’를 선언했다. 여러 사람이 사진을 찍을 정도로 히트를 친 소형 트랙터는 전남 장흥군농민회 김동현 장평지회장 것으로, 아직도 그 트랙터를 기념으로 전시하고 있다고 박 정책위원장은 웃으며 설명했다.

동학농민군의 부활, 농민운동사의 한 획을 긋다

적폐정권을 물리치자는 농민들의 구호는 개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외친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동학농민군이 민중이 도탄에 빠질 때 나라 구하는 길에 당연히 나섰던 것처럼, 21세기 대한민국 한복판에 농민 의병이 부활한 것으로 전농은 평가하고 있다.

동군 대장 최상은 전농 부의장은 “전봉준투쟁단은 우리가 바꾸려고 하는 세상의 불을 지핀 격이다. 하지만 완전히 바뀌지 않은 탓인지, 농민들이 여전히 소외받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군 대장인 이효신 부의장이 어서 건강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농민운동 전선에서 한발 물러서 있는 이효신 서군 대장은 전봉준투쟁단을 말할 때 누구라도 안부를 챙기는 주인공이다. 이효신 서군 대장은 부인인 박연희씨를 통해 지난 12일 자정을 넘어 당시의 벅찬 감동을 문서로 전해왔다. 처음엔 인터뷰가 힘들다고 했으나 <전봉준투쟁단 화보집>을 펼치면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소회를 밝혔다는 게 박연희씨의 설명이다.

서군 대장 이효신 전 부의장은 “전남에서 분위기를 살려줬다. 특히 담양에서 시장을 돌 때 아주머니들이 박수와 환호를 해주고 많은 지지를 얻으며 해낼 수 있겠구나 하는 힘을 많이 받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처음에는 걱정도 되었으나, 가는 곳곳마다 커피 등 마실 것을 주시며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고 출발 당시의 심경과 점점 자신감을 얻어가던 때를 말해줬다.

안성 투쟁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이효신 부의장은 “안성에서 경찰들이 못 가게 막을 때 반드시 뚫고 가야 한다는 각오로 싸웠다. 내가 타고 있는 대장트랙터를 막아 내려서 몸싸움도 거세게 하며 안성IC 진입에 성공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으며, 인터뷰를 청했던 한 기자의 얘기도 들려줬다.

“안성에서 TV조선 최원희 기자한테 전화 와서 인터뷰 요청이 왔으나 거절했더니, 현장까지 직접 찾아왔고 인터뷰 하고 1박2일 있으면서 서울 진입까지 끝까지 취재해 가기도 했다. 나의 소식을 들었는지, 최근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했다.”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하고 또렷하다. 이효신 부의장은 ‘전봉준투쟁단’을 “역사에 길이 남을 농민투쟁사다. 땅 끝 해남에서 서울 한복판 국회까지 트랙터를 끌고 대규모, 조직적 상경투쟁을 한 것은 전무후무하지 않을까”라고 말했고, “전농은 영원히 남을 자랑스런 농민들의 대표조직이다”고 벅찬 소회를 남겼다.

창립 30주년 기념, 전국농민회총연맹 30년사의 기획을 여기서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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