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간식거리가 정말 없었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그나마 가게에서 몇 가지 안 되는 과자라도 사먹을 수 있었지만 그 시절의 농촌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따서 먹고 주워 먹고 그렇게 자랐다. 나도 동갑내기 외삼촌과 함께 그렇게 돌아다녔고 가을이면 더욱 바삐 돌아다녔다. 산에 가서 떨어진 밤도 줍고 도토리도 줍고 들에 가서는 콩서리도 해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를 돌이켜보건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썩은 나무 등걸에서 뜯어온 버섯을 끓는 물에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것이다.그 버섯은 검은색 젤리 같기도 하고 보들보들한 것이 끓는 물에 데쳐 고추장에 살짝 찍어 입에 넣으면 씹기도 전에 목으로 슬쩍 넘어가는 맛이었다. 어른들 몫을 남겨두었다가 아무 버섯이나
항간에 떠도는 일식이 님, 이식이 놈, 삼식이 새끼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몇 일 전 고등학교 동창모임을 필자의 과수원에서 치렀다. 삼십 여명 모여서 고기도 굽고 햅쌀밥에 아욱된장국으로 배들을 불렸다. 모두 만족한 듯 초로의 그림자들이 지워진 환한 웃음꽃이 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하나둘씩 현역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며 고민들을 털어 놓는 것이 아닌가. 필자야 평생농부니 퇴직 걱정은 없어 그런 고민을 해보지 못한지라 친구들의 심각함이 가슴에 닿지 않았다.한 친구가 말하길 혹시라도 퇴직 후에 삼식이 새끼는 되지 말라며 좌중을 폭소로 몰고 갔다. 집에서 한 끼 먹으면 일식이 ‘님’ 이라고 존칭하고 두 끼 먹으면 이식이 ‘놈’이라며 하대를 하고 세끼 다 먹으면 삼식이 새끼라고 욕을 한단다. 퇴직 후에 자기 일
행복한 삶을 위해선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충족될 때 인간은 만족한다. 그 중 어떤 것 하나만 모자라다고 생각해도 스스로 생명을 끊어버릴 수 있다. 부산에서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임플란트 시술비용을 이유로 70대 노인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는데 필요한 치아가 오히려 생명을 앗아간 꼴이 되었다.과거 경로당에선 자식들이 해준 틀니를 자랑했지만 요즘엔 임플란트가 아니면 명함(?)을 내밀지 못한단다. ‘빨리 빨리’ 변해온 우리들에게 임플란트가 사회적 트렌드가 되면서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방송매체들은 교양 시사 프로그램에서 앞 다투어 임플란트를 다루고 있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선택은 두 사람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애민청년회라는 단체의 일원이 된 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은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재열을 비롯해서 거기 모인 사람들과 무언가를 함께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청년회는 매달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창립일 때처럼 스무 명이 넘게 모이는 날도 있고 때로는 예닐곱 명이 모일 때도 있었다. 선택은 모임에 빠지지 않았다. 대개 임상호의 집이었고 때로는 학교 뒷산이나 청계천변에서 야유회처럼 만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꼬박꼬박 참석하는 이들이 단체의 지도부를 형성했다. 조성구가 회장이었고 재열이 모든 일을 관장하는 총무였다. 재열은 이미 학교생활보다 단체의 일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선택도 마찬가지였다. 모임에서는 늘 학습과
아이스크림을 처음 먹던 날이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의 첫 기억이 없다고 해서 아이스크림에 대한 추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통에 담아 다니면서 팔던 아이스께끼를 빈병과 바꿔 먹던 기억도, 광고를 보고 사먹기 시작했던 하드라 불리던 것들에 대한 진한 추억도 넘치게 많이 가지고 있다.그 모든 달콤한 추억들을 품고 있는 아이스크림은 긴 시간 나의 입맛을 붙잡고 간식이나 후식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쩌면 이제부터 아이스크림은 젤라또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내가 이제 젤라또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오미자꿀리를 넣고 만든 오미자젤라또를 만났기 때문이다.젤라또와 아이스크림은 크게 지방의 함량, 공기에 의
토란국을 좋아한다. 미끈하고 끈적거려 가족들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데 유독 필자만 좋아해 추석이 지나고도 며칠간은 토란국으로 끼니를 때운다. 배 수확을 하려면 아내가 반찬 만드는 손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 토란국을 한꺼번에 끓여 놓으려 토란을 캔다. 토란대는 잘라서 따로 말리고 토란은 흙을 떨어내고 간이 저장에 들어간다. 이따금씩 꺼내서 사태나 양짓머리를 넣고 토란국을 끓이련다.토란은 열대아시아가 원산지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삼국시대쯤인 것 같다. 스님이 토란을 캐서 담벼락을 만들어 두었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먹고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토란이 감자나 고구마가 나오기 전에 구황식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흙에서 나오는 달걀이라는 뜻으로 土卵(토란)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이는 토란이
모두가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물론 이미 암묵적으로 동의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만, 우리가 가야할 길은 힘들고 때로는 희생이 따르는 길입니다. 저는 이 자리가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리 수가 많지 않고 시작은 초라하지만 우리 농촌, 나아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주춧돌을 놓는다는 심정으로 모였다고 믿습니다.”재열의 말에는 비장함마저 풍겨났다. 선택 자신이 고민했던 문제를 재열을 비롯해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있었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문득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들도 이렇게 모여서 조직을 만들었거니 하는 생각조차 떠올랐다. 그 정도로 진지하고 열기를 품은 자리였다. 그 자리에 자신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고 뿌듯함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흔히 하는 말로 인생의 매운맛을 모른다고들 한다. 달콤한 삶에 매운맛이 더해져야 제대로 어른이 되는 것인지 음식을 먹는 방법도 우리의 인생과 흡사한 것 같다. 어릴 때는 담담하고 달콤한 음식 위주로 먹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짜고 시고 매운맛을 즐기게 되니 말이다.우리가 혀로 느끼는 맛 중에 최고의 강한 맛은 단연 매운맛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상살이의 어지간한 굴곡쯤은 이겨내는 힘이 생긴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아마도 그와 비례해서 음식을 대하는 태도도 좀 더 자극적이고 강한 맛을 자꾸 찾는 것으로 바뀌는가 보다. 우리 집에만 봐도 음식을 하는 나는 자꾸 매운맛을 높이는 음식을 하게 되고 남편은 매운 고추를 한 끼도 거르지 않고 챙겨 먹는다. 과장 없이 말하면
개똥쑥이 각광을 받고 있다. 암세포를 요격하는 폭탄 같다고 암에 걸린 사람들에겐 희망의 약초가 됐다. 항암효과가 기존 항암제보다 1,200배나 된다는 보고도 있고 보니 그야말로 열풍이 부는 것이다. 원래 개똥쑥은 경기 일부와 강원도 그리고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이었다. 교통이 요란하고 사람의 왕래가 분주해지면서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산이나 들에서 함부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똥쑥은 줄기에 달린 잎이 작고 8월에서 9월에 걸쳐 작고 노란 꽃이 개똥처럼 많이 피고 냄새도 나쁘다해서 개똥쑥으로 불린다. 인진쑥과도 비슷해서 개인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개똥쑥이 효능이 좋으니 이런 저런 이유로 야생개똥쑥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진정 개똥쑥은 뜯지 못하고
2013년도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의하면 보험급여외래진료 다빈도 질환순위에서 급성기관지염 다음의 2위로 치은염 및 치주질환이 차지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 국민은 감기 다음으로 풍치라고도 알려져 있는 치주질환(잇몸병)으로 인해 병의원을 많이 찾는다는 것이다.하지만 언뜻 생각해보기에, 잇몸이 아파서 치과에 갔다는 사람이 제일 많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 사람들은 이가 아파서, 이가 썩어서, 이가 흔들려서, 이를 해넣으려고 치과에 방문한다. 그런데 왜 치주질환이 가장 많다고 하는 것일까.이유는 실제로 이가 아파서 등의 이유로 내원한 사람이라도 대부분 어느 정도의 치주질환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주질환은 이환빈도가 아주 높으면서도, 흔히 ‘침묵의 질병’
요컨대 예수의 제자나 하느님의 아들뻘 되는 이들이 셋이나 나타나 이적을 행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근래 들어서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음은 선택도 실감하고 있었다. 선택이 살고 있는 집에서 학교까지 오가는 길에만 해도 전에 못 보던 교회가 열 개도 넘게 생겨났다. 가정집 같은 작은 건물에 십자가를 세워두고 감리교다, 장로교다 하는 명패를 붙여놓았는데, 선택으로서는 오리무중이었다. 교회라고는 고향 마을 언덕배기에 있던 개척교회라고 불리던 곳에 두어 번 기웃거려본 게 다였다. 그런데 요즘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들은 기존의 교회와도 또 다른 모양이었다. 조성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목을 다듬었다.“조금 전에 김재열 동지가 3월에 가보았다는 남산 집회는 아마 박태선이라는 이가
1928년 발행된 잡지 에서는 가을에 먹는 풋김치에 대해 ‘고소한 품이 혀가 이 사이를 저절로 더듬으며 돌아다닐 만큼 맛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요즘은 먹을거리들이 워낙 종류도 많고 귀한 것도 많고 멀리서 온 것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지만, 그래서 이른바 먹방의 시대라고들 하지만 음식의 맛에 대한 표현이 아주 밋밋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혀가 이 사이를 저절로 더듬고 다닐 만큼 맛있다는 표현은 재미도 있거니와 어떤 맛이기에 그런 표현을 썼는지 나도 한 번 먹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때마침 우리 집의 손바닥만 한 밭에 일찍 심은 김장배추가 제법 자랐다. 대충 씨를 뿌린 까닭도 있지만 솎아먹는 배추의 맛에 재미 들려 넉넉히 심었기에 조금씩 자랄 때마다, 필요할 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