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35회

  • 입력 2014.09.26 23:2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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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숨을 죽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물론 이미 암묵적으로 동의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만, 우리가 가야할 길은 힘들고 때로는 희생이 따르는 길입니다. 저는 이 자리가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우리 수가 많지 않고 시작은 초라하지만 우리 농촌, 나아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주춧돌을 놓는다는 심정으로 모였다고 믿습니다.”

재열의 말에는 비장함마저 풍겨났다. 선택 자신이 고민했던 문제를 재열을 비롯해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있었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문득 일제치하의 독립운동가들도 이렇게 모여서 조직을 만들었거니 하는 생각조차 떠올랐다. 그 정도로 진지하고 열기를 품은 자리였다. 그 자리에 자신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고 뿌듯함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몇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은 우리 모임의 이름을 짓는 일과 회칙을 통과 시키는 일입니다. 지방에서 어렵게 올라온 동지들도 있으니까, 되도록 오늘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이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제가 미리 몇 분하고 논의한 이름은 애민청년회입니다. 사랑 애자에 백성 민, 물론 민족이라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어떠십니까?”

이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별 이견이 나오지 않았다. 그 때 한 청년이 손을 들었다.

“저는 여주에서 농촌운동을 하고 있는 한석채라고 합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서는 뜻을 같이 하는 청년들 이십 여 명이 여러 활동을 하고 있고 제가 대표 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만, 아직 이 모임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다 모은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절반쯤 되는 청년들은 굳이 서울에서 조직되는 이런 모임에 가담해야 하는지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설명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 해서, 우리 모임, 그러니까 애민청년회의 취지문이랄까, 발기문 같은 게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좀 더 쉽게 이해를 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이 찬동했고 취지문을 작성하기 위해 세 사람이 위촉되었다.

“대강 짐작은 하시겠지만 우리 모임은 공개적인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비밀 조직도 아닙니다만, 대외적으로 애민청년회를 내세우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는 공연한 의심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측면과 관에서 주도하는 농촌계몽운동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가 주요하게 해나가려 하는 협동조합운동을 위해 각자가 보안에 신경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는 거리낄 게 없으니까 겁을 먹을 필요는 없지요.”

한창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다과와 막걸리를 내왔다. 부잣집답게 다식과 약과에 양과자까지 소반 몇 개에 나누어 놓았는데 다들 상기된 터라 누구라 먼저 손을 대는 이가 없었다.

결말이 지어진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은 회원에 관한 것이었다.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회원과 서울에 사는 회원을 이원적으로 두되, 중점 활동은 지역회원들이 맡아서 하는 방식이었다. 지역회원들이 면이나 부락 단위로 조직을 하고 활동을 해나가며 서울에 있는 회원들은 그들을 적극 지원하고 지속적으로 농촌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는 것이었다. 방학이나 휴학 기간을 이용하여 서울 회원들은 지역으로 내려간다는 원칙도 정해졌다. 이미 경기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지역의 청년들이 상당수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선택은 들을수록 놀라웠다. 학교에 다니는 김재열이 언제 어떻게 그런 조직을 만들 수 있었는지 의아스러웠다. 물론 이미 졸업한 이들도 있고 선택이 모르는 누군가의 힘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모임의 주도자는 재열이 분명했다.

막걸리가 한 순배씩 돌고 비상연락망을 작성한 후에 모임은 끝났다. 서너 시간에 불과했지만 참으로 길게 느껴진 한 나절이었다. 서로 인사를 마치고 나서도 선택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사람들을 보내느라 분주한 재열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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