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께서 올해에 99세가 되십니다. 살아계신다면 금년 생신날에 기념잔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래들의 아버지에 비해 훨씬 연세가 많으신 편이지요. 그런 아버지의 문화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나의 이름이 최대한 토속적이고 촌스럽습니다.친구들 이름은 미정이나 미경 등 비교적 그 시대가 반영된 편이지만, 1919년생 아버지께 막내딸 이름이 말숙이든 점숙이든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덩달아 잘 커 주라는 기대만 있었겠지요. 더러 개명을 권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만 아버지의 선견지명(?) 덕택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니 그냥 이대로 살겠다고 농으로 화답합니다.살면서 힘들 때마다 이 모든 것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이라고 원망 아닌 원망의 결론을 내리고는 했습니다
지난 연말에도 산골짜기 우리집은 손님맞이로 분주했습니다. 시끌벅적하게 연말을 보내야 송구(送舊)하는 맛이 제대로 나는 모양인지, 술자리와 장구장단에 가무까지 곁들인 걸쭉한 해넘이 자리가 꾸며졌습니다.요즘에도 그렇게 즐기는 사람들이 있냐겠지만 손님들 중 일부가 음주가무파가 있어서입니다. 그러다보니 융숭한 대접이 아닌데도 외딴 우리집이 연말모임의 최적지로 꼽힙니다. 와 주는 것으로도 고맙고 여럿이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이 있으니 마다않고 환대했습니다.대개의 약속이 그렇듯 모임날짜가 잡히면 그때부터 손님맞이 계획으로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청소며 식단, 잠자리 등등 모든 것에 대해 사전에 그림을 그려야 하니까요. 게다가 시골인심은 돌아가는 길에 손에 쥐어줄 것까지 계산을 하게 마
마를 대로 마른 밭둑의 억새에도 강풍에 흔들리는 강가의 갈대에도 길섶의 마른 낙엽 하나에도 눈길이 머문다. 무심히 지나쳐지지가 않는다. 빛나고 화려하고 싱싱한 것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빛이 바래 노래진 것도, 볼품없이 사그라지는 것도,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한 줄기 빈 대공조차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다른 날은 다른 날인가 보다.2018년 새로운 해라고 해서 태양이 다를까만, 새로운 날이라 해서 태양의 빛이 다를까만 날짜가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농촌에 살지 않는 지인들이나 가까이 살지 않는 지인들이 가끔은 정말 궁금한 듯이 묻는다.“요즘 뭐 하세요?”농촌에 살지 않거나 가사 일을 하지 않는 남성, 여성농민회 등 단체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요즘 뭐 하는
농협에서 새로이 제작한 가계부를 지점마다 비치해뒀다고 필요한 사람들은 챙겨가라고 공지합니다. 고맙게도 말입지요. 농협 가계부는 짜임새가 좋습니다. 수입과 지출항목도 큼직하니 쓰기 좋고, 빈 공간 곳곳을 살려 농촌축제도 알리고 제철요리 재료와 요리법도 안내합니다.지역축제와 제철 농산물을 알리는 일도 따지고 보면 농가소득을 높이고 지역경제를 활성화 시키고자 하는 고민이겠지요. 곳곳이 농업과 농촌에 대한 농협의 고민이 담긴 풍성한 가계부입니다.그 좋은 가계부의 용도가 나에게는 농사일지에 불과합니다. 처음에는 수입과 지출, 제사며 가족들의 생일까지 꼬박꼬박 기록하는 재미로 가계부와 만났는데 어느 순간 지출중심으로만 기록되는 가계부가 재미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농가지출의 대부분이 농자재인데
김장과 메주 쑤기를 끝으로 그럭저럭 한 해 일은 마무리 된 셈입니다. 축산농가나 시설채소농가들은 여전히 바쁘겠지만 노지농사를 하는 대부분의 농민들은 이 철에는 비교적 짬을 내기가 쉽습니다. 어르신들께서는 마을회관으로 모이는 날들이 잦아지고 젊은이들은 동무를 찾아 읍내로 가지요.더불어서 연말이 가까워지면 각종 계모임이나 동창회, 작목반들과 각 단위에서 결산을 주 내용으로 하는 총회를 엽니다. 큰 무리 없이 총회나 사업보고 대회를 마치고 식사를 하며 그간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사람살이의 맛을 느끼곤 합니다.연말의 나들이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사회적 관계망을 알 수 있습니다. 공적인 모임이 많은 사람, 사적인 계모임이 여럿인 이도 있고, 그 와중에도 외부활동을 아예 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지
내년 9월부터 기초연금이 월 20만원에서 25만원으로 오른다고 하지요? 동시에 5세미만의 아동들에게는 월 10만원 아동수당 지급이 신설된다고도 하네요. 육아에 대한 부담 때문에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젊은이들에게나 연세 있는 분들의 노후생활이 보다 윤택할 수 있도록 국가가 힘을 쓰는 모양입니다. 두루 좋은 일이지요.내년도 정부예산안이 통과된 다음 날의 뉴스는 온통 기초연금과 아동수당에 대한 얘기였고 또 그만큼 지역에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장 호주머니에 돈이 더 주어진다하니 혜택을 받는 사람들도 그렇거니와 세금을 내는 사람들도 관심이 집중되는 모양입니다. 암요, 그것도 좋은 일이지요. 국민들이 나라살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백 번 천 번 지당한 일입니다. 세금을 잘 못 매기는 것도 문제요, 잘
상쾌함은 차가움인가 보다. 12월 초입의 세찬 바람이 춥게 느껴지기 보다는 쨍한 쾌감을 안겨준다. 머리가 맑고 명료해진다. 또 한 살의 무거움에 대해 생각하는 올해의 마지막 달이다.우리 마을은 하우스 농사가 없다보니 12월이면 모든 농사가 마무리 된다. 긴 가뭄에 애 태우던 봄날도, 뜨겁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 했던 더위도, 징그러웠던 병충해도 어느새 남의 일 같은 지난날이 되어 버렸다. 수확량이 많던, 적던 모든 수확은 끝났고, 수입이 많던 적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다. 아침에 본 마을회관에는 활기가 돌았다. 어르신들은 어르신대로 중년층은 중년층대로 지난 가을이 바빴다. 이제는 그런 가을을 보내고 회관에 둘러 앉아 같이 먹을 밥상을 여유 있게 차리는 계절이 됐다.그러나
정부는 2005년도부터 쌀에 대한 정부 수매제를 폐지하는 대신 공공비축미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쌀시장 개방에 대비해 국내 쌀 농가들의 경쟁력 제고를 위함이라고 거창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쌀값폭락의 주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타 작물로 생산을 전환해 농산물의 전반적 가격이 하락하는 등 농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정부의 부실한 양곡정책이 쌀값을 폭락시키자 시장격리미곡이라는 이름으로 또 별도의 정책을 수립했습니다. 공공비축미이든 시장격리미곡이든 농민들은 여전히 정부수매로 인식하며 시중보다 조금 비싸다는 이유로 어쨌거나 꼭 출하를 해냈습니다. 심지어는 도지로 받은 나락을, 답주가 공공비축미로 내려는 농가도 있어 뒷말을 듣고는 하지요.올해 우리 마을은 처음으로 시장격
살다보면 자신이 태어난 생일이랄지 결혼기념일이랄지, 심지어는 나라에서 정한 국경일도 뭐 그리 중하냐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매순간 충실하게 살지 않으면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척박한 농촌살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눈 뜨자마자 일로 시작해서 잘 때까지 일입니다.힘들고 바쁠 때는 유일한 휴식시간인 점심 식사시간이 기다려지고 잠자리에 들어서 다리를 뻗을 때가 제일 행복하기도 하지요. 먹고 잠자는 일 외에 삼라만상 재미있는 일들이 하고 많은데도 그 시간이 좋을 지경이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가계비중에서 식료품 구입비 비중이 제일 높을수록 가정경제가 곤궁하다 했는데, 하루 중에 무엇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재미있냐는 질문에 따른 답으로 삶의 질을 규정하는 그런 생활 척도 검사는 없을까요? 있다면 필경
며칠 전 작목반 나들이가 있었습니다. 매년 나다니던 것을 격년으로 바꿔서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김치 담고 안주시키고 간식봉지 싸고 무엇보다 사람 챙기는 부담이 확 줄었으니까요. 이제 대부분 추수가 끝났으니 마음이 가벼운 즈음에 타지로 나들이 가는 즐거움은 확실히 농민들만이 느끼는 여유인 듯합니다. 남도까지 덮친 가을을 만끽하며 말입지요.초창기에는 작목의 특성에 맞게 시금치나 마늘 주산지에 다녔는데 지금은 다닐 만큼 다닌지라 호기심을 채워줄 마땅한 선진지(?)가 없어서 농업관련 전시장을 찾기도 합니다. 역시나 빠질 수 없는 곳이 농기계 박람회장입니다.올해는 김제 벽골제에서 한다하니 남도의 바닷바람을 몰고 신이 내린 지평선의 고장으로 다랑논지기들이 가게 된 것입니다. 톤백 나락을 실은 트럭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가을 추수철이 되면 콤바인, 트럭, 경운기 등 기계소리가 “다다다” 요란하게 아침을 시작하고 햇살이 따뜻하게 퍼지는 한낮이 되면 기계소리 보다 사람소리가 더 크게 맑은 가을하늘을 울리던 때가 있었습니다.나락이며 밭곡식 수확량은 얼마가 나오는지 작년과 비교해 보기도 하고, 이웃과도 비교해 보면서 덜 나오면 덜 나오는 대로, 많이 나오면 많이 나오는 대로 기분이 좋아서 한잔, 기분이 나빠서 한잔 그렇게 술잔이 흥겹게 오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락 베는 논둑이라면 여지없이 안주 없는 막걸리 잔이 먼지 속에 놓여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그러나 오는 사람도 없고 가는 사람도 없고 기계소리만 요란한 올 가을을 지나고 나니 그 때가 까마득한 옛날인 것만 같습니다. 가을의 빛은
며질 전, 부부가 꼭 같이 농사를 지어야 돼요?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여자후배가 있었습니다. 아니, 어… 그런데 같이 지어야 되지 라며 흐릿하게 답을 했습니다. 뒤늦게 농사를 시작한 젊은 부부인데 이미 물어보는 말 속에 같이 농사를 짓자니 여러모로 힘들다는 뜻이 들어있고, 나 또한 같이 농사를 안 지어도 되지만 그럴 경우 살림이 엉망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답변을 한 것입니다.부부가 함께 짓는 농사와 어느 한 쪽만이 짓는 농사가 현재의 수준에서 보자면야 비교할 것이 못 됩니다. 농업 선진국처럼 일정정도의 소득이 보장되는 조건에서 전업화, 규모화, 기계화된 농사의 경우는 몰라도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십중팔구 규모나 농사의 질에서 차이가 날 것입니다.농사일을 부부가 따로 한다는게 말이나
마을회관 현대화 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탓에 요즘은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붉은 벽돌에 기와를 얹은 마을회관이 보기에도 참 좋습니다. 스쳐 지날 때면 덩그러니 서있기만 하는 마을회관인 듯해도 마을 대소사를 결정할 때나 대동회 할 때, 또는 마을분들이 돌아가실 때면 회관 안마당에서 노제를 지내며 마을에서 한평생 살다간 망자의 혼을 달래는 등 마을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요긴한 공공의 장소입니다.보기에도 좋고 활용도가 높은 우리 마을회관이 다 좋은데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의외로 부엌이 좁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나누려고 부엌바닥에 두세 명만 자리를 잡아도 통로가 없습니다. 그러니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의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지요.거기다가 싱크대에서 물이라도 사용할 량이면 물이 튀어
잦은 가을비와 가을비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인 덕에 월동작물 파종도 얼추 끝나 갑니다. 수확기의 잦은 비가 밉지만 그래도 작년처럼의 폭우는 아니어서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을 예쁘게 해봅니다. 날씨랑 농사는 한 몸처럼 움직이는 지라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탓할 수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공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깨닫습니다. 마늘파종이 한창이던 때, 일 해주러 오신 분이 하도 열심히 일하고 저녁 늦도록 고생을 하길래 고맙고 미안해서 상냥한 표정으로 무엇을 해드리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술을 좋아하는데 술 중에는 입술이 최고라고 천연덕스럽게 농을 합니다. 순간 얼음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런데 더 한심한 것은 나의
황금보다 더 빛나는 벼 이삭의 찰랑한 노란 물결이 온 들녘을 일렁이게 하지만 그 아름다움도 잠시, 차디찬 뉴스가 가슴을 파고든다. “한-미 FTA 재개정 합의”라…. 한숨이 나온다. 하….농민, 노동자, 시민들의 촛불투쟁으로 들어선 문재인정부가, 소득 복지 일자리 창출을 통해 사람이 돌아오는 농산어촌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칼보다 더 날카로운 카드를 농민들에게 내민다. 헛웃음이 나온다. 참….우리나라의 경제성장 토대 위에 농업의 희생이 있었음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다. 자동차 수출을 위해 농민들이 통곡을 삼켜야 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2012년 발효된 한-미 FTA 역시 농업의 희생을 담보로 이뤄진 협상이었다. 그 협상이 농민들을 죽음으로 내 몬다고 얼마나 반대했던
추석이 바짝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추석이란 게 별 것도 아니면서 또 별 것인 듯합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추석 전에 해치워야 한다거나 추석 뒤에 하면 된다고 설정을 하게 되니 추석이 기준이 되는 셈이지요.사실 명절음식을 준비하고 대청소를 하는 등 손님을 치르는 일이나, 그동안 미뤄두던 집안일을 들추는 부담으로 치자면 추석이 없는 것도 괜찮을 상 싶어요. 그렇지만 생활상의 부담을 이유로 이런 것 저런 것 다 뿌리치면 우리 삶이 무엇으로 채워지겠어요? 그러니 다가오는 명절은 그 명절의 의미를 잘 살리는 것이 가장 값진 일이겠지요.오래 전부터 명절 때마다 마음속으로 꿈꾸던 일이 하나 있습니다. 아직도 엄두를 잘 못 내고 있는 일이지만, 뭐 거창한 것도 아닙니다. 뭐냐고요? 추석맞이 우리
수확과 파종을 동시에 하는 들녘이 분주하기만 합니다. 마을안길을 달리는 경운기들도 자동차로 치면 5단 기어 쯤 될 만큼 딴에는 초고속입니다. 일철의 고속 경운기 엔진소리는 그 옛날 추수하는 들판의 풍물선동대 마냥 신명과 기운을 북돋워 줍니다.누군가의 바쁘고 잰 움직임은 상대방에게조차 힘을 불어 넣어 주니까요. 일이 처지게 되면 두 배로 힘들다고 남들이 일을 할 때 같이 서둘러야 한다고 시어머니께서 힘주어 말씀하시는 까닭도 이 때문이겠지요. 곁의 사람이 주는 조금의 긴장감이 힘의 또 다른 원천이 된다는 것을 어른들은 익히 아시나봐요.이 바쁠 때 농협이나 행정 사무실에 들어서면, 그 고요한 정적에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와 펜글씨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 같은 곳의 다른 세상에 빈정이 상하기도
이곳은 마늘농사를 시작하는 이 즈음이 연중 가장 바쁘고 고된 철입니다. 마늘농사는 품이 많이 들고 기계화가 덜 된 작목이다 보니 농사가 힘에 부쳐서 다른 집들은 농사규모를 줄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집은 되레 양을 늘려가는 상황이니 그 부담이 더할 수밖에요.마늘농사의 가장 시작은 씨마늘 준비입니다. 여름내 잘 보관해둔 마늘을 일일이 쪽을 분리하는 것인데 이 작업도 만만찮게 손을 잡습니다. 게다가 이 일은 시어머니께서 도맡다시피 하시므로 초가을 날, 퍽이나 바쁘십니다.그런 사정을 잘 아시는 어머니의 마을 동무분들께서 어머니를 도와주시러 우리집에 오셨습니다. 갑자기 오신 분들의 점심식사를 부랴부랴 준비해서 대접을 하는데 마을분들께서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는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서울에 토론회 가야할 일이 있어서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부엌에 들어섭니다. 저야 아침을 안 먹고 집을 나서면 그만이지만 오늘 세끼를 집에서 먹어야 하는 남편이 있으니 국이라도 끓여 놓으려고 말입니다. 농사일이 바쁜데 집을 비우는 것이 미안해서 반찬이라도 몇 가지 해 놓으려고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비비고 일어났습니다.사실은 며칠 전부터 괜히 마음이 바빴습니다. 하루 집에 있어서 많은 일을 하지는 않으면서도 하루 집을 비운다는 생각을 하니 이것도 미리 해 놓아야 할 것 같고 저것도 미리 해 놓아야 할 것 같고 그랬습니다. 밥, 국, 반찬 몇 가지를 초스피드로 식탁에 차려놓고 이제 후닥후닥 세수를 합니다.토론회장을 빙 둘러보니 거의가 남성들입니다. 여성들은
고추유기농 전문가의 강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을농사준비로 몸보다 마음이 바빠지는 철인데도 일 걱정일랑 훌훌 털고 교육에 참석을 했습니다. 유기농으로 고추농사를 얼마나 잘 짓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던 까닭에요.조는 둥 듣는 둥 어중이떠중이 공부를 하다가 교육말미에 예의 그분을 만났습니다. 외모만으로는 강의의 질을 평가하기 어려우리만치 평범한 농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강의와 함께 반전이 시작됐습니다.반복되는 실험, 그 결과를 정밀하게 적용하는 태도는 농민이 아니라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분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정확하게 낚아채서 명확한 설명으로 되물을 필요가 없도록 했습니다. 여기저기 감탄의 목소리가 연발해서 터져 나오고 비로소 수강생들이 등허리를 곧추 펴고 자세를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