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우리 마을의 가을

  • 입력 2017.11.10 16:35
  • 수정 2017.11.15 21:38
  • 기자명 김정열(경북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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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까지만 해도 가을 추수철이 되면 콤바인, 트럭, 경운기 등 기계소리가 “다다다” 요란하게 아침을 시작하고 햇살이 따뜻하게 퍼지는 한낮이 되면 기계소리 보다 사람소리가 더 크게 맑은 가을하늘을 울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김정열(경북 상주)

나락이며 밭곡식 수확량은 얼마가 나오는지 작년과 비교해 보기도 하고, 이웃과도 비교해 보면서 덜 나오면 덜 나오는 대로, 많이 나오면 많이 나오는 대로 기분이 좋아서 한잔, 기분이 나빠서 한잔 그렇게 술잔이 흥겹게 오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락 베는 논둑이라면 여지없이 안주 없는 막걸리 잔이 먼지 속에 놓여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는 사람도 없고 가는 사람도 없고 기계소리만 요란한 올 가을을 지나고 나니 그 때가 까마득한 옛날인 것만 같습니다. 가을의 빛은 있지만 가을의 소리가 사라져 버린 가을입니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어른들이 “너희들도 나이 들어 봐라, 한 해 한 해가 다르다”고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 참말 빈 말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건지 남이 다른 건지 올해 우리 마을의 가을이 다릅니다. 나락 벤다고 해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으니 자연히 막걸리도 필요 없습니다. 자기들 논에서는 나락 많이 났다고 은근히 자랑해 대는 얄미운 이웃도 없으니 속 쓰릴 일도 없습니다.

하기는 이제는 나락 많이 나고 적게 나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껌값 보다도 못한 나락값, 적게 나도 그 살림살이, 많이 나도 그 살림살이. 재미가 없습니다. 나락값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작년에 비해 조금 오른 것일 뿐 생산비에 못 미치는 것은 똑같습니다.

나락값 조금 올라봐야 여전히 이른 봄에 낸 영농자금과 올 한 해 쓴 비료와 농약대 등 자재값 갚고 나면 또 다시 농협 대출을 내야할 살림살이이니 나락이 많이 나도, 나락값이 올라도 아무 신날 일이 없습니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유난히 아프신 분들이 많습니다. 아니 ‘유난하다’는 말도 틀린 말인 것 같습니다. 모두가 한 살 한 살 늙어만 가니 아픈 것은 ‘유난’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큰 소리로 웃기도 하고, 속이 상하면 큰 소리도 낼 젊은이들이 없는 가을은 적막하기만 합니다.

오토바이 타다가 허리를 다친 화동 아지매는 허리를 구부리지 못해 가만가만히 가을 햇살 밑을 걸어 다니고, 감 따다가 컨테이너 박스에 옆구리를 박힌 안룡 아지매는 조심조심 가을빛을 거둡니다. 무리하게 일을 하다가 병원에 입원한 담배집 아지매가 안 계신 골목길은 불빛조차 없는 어둠입니다.

아프거나 씁쓸하거나 허전하거나 그래도 시간이 가니 차츰차츰 가을일이 마무리 되어 갑니다. 끝을 보자면야 모든 것이 얼어붙는 시간이 돼야 하지만 하나하나 갈무리가 돼 가는 것을 보니 올해도 저물어 가나 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을은 또 한 살 늙어 갑니다.

벼꽃이 필 때 유난히도 많이 내리는 비에 나락이 채 여물지 못하고 쭉정이가 될까봐 애 태우며 바라보던 불당골 논도, 혼골 논도 이제 텅 비었습니다. 뜨거운 햇빛 아래 풀 매느라 힘들었던 생강밭도 이제는 바싹 마른 잎만 남았습니다. 가을 농사의 끝은 내년 봄 농사입니다. 내년 봄에 새파랗게 돋아 날 마늘이며 양파며 보리가 가을 햇빛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햇빛 속에 내 마음도 들어 있는 가을 오후가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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