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값이 한참 폭락하던 지난 여름, 거창지역의 여성농민들 앞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농민수당 이야기를 하다가 인생이 운빨 아니냐고 했습니다. 가령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는 내 남편뿐인데 하필 원예작물도 과수농사도 아닌 좁은 농지에서 노동강도는 최고로 세고 부가가치는 참으로 낮은 마늘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그러면서 밤낮 기온차가 많이 나서 명품사과를 생산하는 당신들은 남해 농민들보다는 훨씬 운빨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그 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며 웃었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운빨에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지역 간이나 산업
추석을 앞두고 몇 주간 계속된 비와 흐린 날씨. 땅과 하늘에 기대어 살아가는 농민에게는 추석의 풍요로움 보다 명절이 지나도 괴로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추석이 빠르나 느리나, 추석 전에 비가 많이 오거나 안 오거나. 농민에게 안전장치가 있어 속상해도 근심까지는 되지 않는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고 보름달에 기원해본다.그래도 추석은 즐거워야 하는 명절,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처음으로 나를 생각하는 추석에 도전했다. 365일 중 이틀씩 두 번의 큰 명절과 제사는 외며느리인 나에게는, 아이가 4명씩이나 되는 나에게는 과로를 동반한
‘도대체 이놈의 비는 언제까지 내린다냐? 아무 씨잘떼기 없는 비가 하루 왼 종일 추적추적 내리기만 하고 있으니.’베어놓은 참깨는 못 볼꼴을 보이고 있다. 가만히 서서 싹을 틔우고 각양각색의 곰팡이란 놈이 하나둘 피기 시작한다. 농사 시작하고 처음으로 재배한 참깨인데, 쉬워 보였는데, 작기도 길지 않게 보였는데….하지만 참깨라는 놈은 완전 내 생각을 간파하고 있는 듯 ‘그래 너 한번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을까? ‘울고 싶어라’ 노래가 절로 터져 나온다.참깨를 베어내고 무 씨앗을 넣을 때만 해도 ‘아싸 하늘이 내 일을 하나 덜어주는군’
열심히 농사를 짓는 이웃이 있다. 젊어서 두 부부는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이제는 나이가 여든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농지를 정리하시고 계신다.20년 전에 남편이 열심히 사는 부인을 위해서 밭 하나를 아내 이름으로 등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마음속 깊이 내 땅이 있다는 것에 스스로의 자존감도 높아지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얼마 전에 몸이 아파서 병원비를 한다고 땅을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양도소득세 감면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이 농사를 지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농지원부랑 농가경영등록체에 등재돼 있
어느덧 여름이 끝나갑니다. 이제 여름나기는 더위와의 전쟁을 치르는 듯 힘겨운 살이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여기 남녘은 가뭄까지 겹쳐서 밭작물들이 맥없이 늘어져 있다가, 이 여름이 끝날 이 즈음에서야 열 오른 대지를 식혀주고 메마른 땅을 적셔주는 단비가 내립니다.그 더운 날들을 무얼 하고 지냈을까? 하고 돌아보니 지난 여름에는 유독 행사가 많았습니다. 마늘값 폭락으로 각종 회의나 간담회를 진행했고 힘을 행사하는 농민대회도 있었습니다. 또 단합대회 행사도 많았습니다. 해마다 하는 행사이지만 올해는 남편과 같이 안팎으로 집행책임자를 맡다
웽~웽~치지찍, 숨 가쁜 기계음이 새벽의 산과 들을 깨운다. “와~ 또 풀치시는구나.” 우리집 뒤 논주인 아저씨는 주말이면 논두렁의 풀을 치신다. 축구장 잔디처럼 까까머리가 된 논두렁은 보기도 좋고, 깔끔하기도 하다.자주 풀을 치는 아저씨는 부지런하시기도 하지만 사실상 논농사가 얼마 되지 않아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우리집 주변 풀은 숲처럼 우거지는 요즘이다.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풀이 참 많이 컸네” 말하면 “에휴” 남편의 한숨이 이어진다.남편의 여름은 그야말로 풀과의 전쟁이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사과밭,
남편 고향친구들 모임이 있습니다. ‘붕우회’ 누가 들어도 어떤 모임인지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모임이라며 맨날 놀림을 받습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농공단지 노동자로, 포크레인 기사로, 농기계대리점 사장으로 각자의 하는 일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간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맺어진 친구들입니다.초등학교 동창끼리, 서울 사는 처녀가 이모의 중매로, 가지각색의 인연으로 맺어진 친구들의 모임은 자연스럽게 가족들의 모임으로 이어졌습니다. 두 명의 친구는 첫 세대 국제결혼을 했습니다. 덕분에 두 명의
외출을 준비한다. 옷장을 열어 보지만 내게 어울리는 옷을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검게 그을린 얼굴 그리고 자주 옷 구입을 하지 않는 나는 그냥 최근에 선물 받은 옷을 입고 외출을 준비한다.거울로 얼굴을 보니 저번에 봤을 때 보다 훨씬 많이 탔다. 그래도 올해는 딸아이가 피부암을 걱정하면서 사준 선크림을 나름대로 열심히 발랐지만 바쁜 시간 속에서 잊어 먹고 안 바르기 일쑤였다. 그 사이 얼굴은 검게 탔고 팔과 다리도 검게 그을려 있다.얼마 전 그동안 묶었던 머리를 짧게 잘랐다. 나이가 들어서 머리를 묶으니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빠져서
초복을 지난 지금이 우리 지역에서는 제일 한가한 때인가 봅니다. 깨밭도 다 매고, 콩밭도 잡초가 못 자랄 만큼 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아직 고추는 익지 않아서 간간이 병해충 방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줄진 논바닥만 보일 정도로 벼가 자랐지만 항공방제를 하는 통에, 농약치고 약줄 잡으며 부부간에 싸우는 일도 이제 그 옛날 전설이 되고 말았네요.이럴 때면 마을회관이나 정자나무 아래, 또는 도량 좋아 마음의 가시가 없는 사람의 집으로 일없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때마침 무성하게 자란 호박잎 아래 탐스럽게 매달린 호박을 따서 넓은 대야
16개월 된 막내아들을 데리고 농협에 갔더니 “어머 축하드려요”, “쌍둥이라면서요” 농협직원이 뜬금없는 반색을 하며 축하한다. “엥~ 뭐가요. 제가요? 헉.” 화들짝 놀라, 질색을 하며 거부감을 드러냈다.“사시는 마을에 그 집 있잖아요. 쌍둥이라면서요?” “아 ㅇㅇㅇ 아저씨네, 정말이요, 잘됐다.” 그제서야 경계하던 마음은 어느새 반가움으로 바뀌어 더 소리 높여 맞장구를 치며 좋아했다. 휴, 다행히 이미 아이 넷이 있는 내 얘기는 아니었던 것이다.경사다. 우리 마을 어느 집에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이다. 더구나 아이를 보기 힘든
정금언니는 초등학교 조리사입니다. 쉬는 날엔 밀린 농사일로 눈코 뜰 새 없답니다. 남편 또한 건설일까지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니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이자 여성농민회 사무국장입니다. 창근씨는 톨게이트 수납원입니다. 고추장 담가 팔아야 할 창근씨 어머니는 고추끈도 묶지 못한 1,000주의 고추를 보며 한숨을 쉽니다.“어쩔 수 없어요. 그냥 올 고추농사 포기합시다.” 효자 창근씨는 톨게이트 노조 지부장입니다. 팔순이 다된 어머니는 놉을 얻어 고추끈을 맵니다. 아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기에 타박만 하고 있을 수 없었겠지요. 농
1994년부터 토종닭을 키우고 있다. 넓고 공기 좋은 산에 닭을 방사해 키우고 있다. 어느 날 축산물 가공처리법이 시행되면서 도계장에서 도계를 해야 한단다. 그래서 닭 200여 마리를 가지고 도계장에 갔다. 닭을 컨베이어벨트에 넣자마자 사방으로 닭이 날아올랐다. 컨베이어벨트는 우리집 닭에게는 러닝머신이었다. 도계장은 비상사태가 됐다. 닭들은 옆 공장까지 날아다녔고 직원들은 날아다니는 닭들을 잡으러 다녔다.다시 케이지에 넣어 직접 다리를 걸고 컨베이어벨트 위의 닭은 고리로 다리를 걸어 끌어냈다. 한 마리 걸고 20여개 뒤에 한 마리
팥 없는 살림은 되어도 콩 없는 살림은 안 된다 하고, 깨 없는 살림은 살아도 고춧가루 없이는 못 산다고 어른들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아마도 우리 식생활에서 콩이나 고춧가루의 비중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더라도 팥에 깨를 빗대는 것은 좀 과하다 싶습니다. 떡이나 죽 등의 특별식에 쓰이는 정도의 팥과 온갖 반찬에 다 들어가는 참기름과는 애당초 비교할 바가 못 되니까요.생각해보면 300여 가지가 넘는 나물을 먹는 우리민족의 지혜는 참기름과 깨소금의 공으로 돌려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 자라면 독초가 되는 풀도 어린 시절에는 나물로
여성농민으로 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땅냄새, 풀냄새, 벌레들의 분주한 움직임, 호미질과 함께 불쑥 튀어나오는 지렁이의 치열한 몸부림, 해뜨기 전 차분히 가라앉은 안개, 이른 아침 부지런히 날아오르는 산새소리, 호미로 흙 끌어내는 소리에 맞춘 숨 가픈 나의 호흡과 씨앗에서부터 힘껏 솟아오른 생명들을 마주할 때 모든 존재에 대해 감동하고 감사하게 된다.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더욱이 여성농민의 농사노동, 생산자로써의 소득은 형편없었다. 농사는 안정된 소득으로 이어지기 힘들었고 소규모로 지은 농산물은 공판장에 가지도 못했
오늘(6일)은 농사일이 절정기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망종(芒種)이다. 오죽했으면 부엌에서 불을 때던 부지깽이도 일을 거들며, 발등에 오줌을 싼다는 말이 망종과 더불어 흘러 내려오는 말이 되었을까?“그래도 지금은 양반이여.” 별일도 아니라는 말을 이리 표현하시는 어머님이 땀을 흘리며 내뱉는다. 온 동네 사람들이 공동모내기를 해야 했는데 지금은 이앙기 한 대가 하루에 동네 들판 10필지는 족히 심어 제끼니 대단하다 싶으신가 보다. 소와 쟁기로 논 갈고 밭 갈던 때와 어찌 견주겠나 싶긴 하지만 50마력의 트랙터가 논을 갈고 저수지에 수로
얼마 전에 극한직업이라는 영화를 봤다. 많이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의 직업 농촌의 아낙, 이보다 더한 극한 직업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1993년 귀농을 했을 때 다섯 살, 넉 달 된 두 아이가 있었다. 처음 일 년은 시골 가서 아이만 키우면 된다는 남편의 말처럼 나는 아이 둘을 키우는 일에만 집중했다.그러던 어느 날 토종닭을 키우던 남편은 방목으로 정성껏 키운 닭을 팔려고 했으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사겠다는 상인의 말에 화를 냈다. 상인은 사료값만 더 들어갈 텐데 하면서 자리를 떴고 남편은 상인에게 닭을 넘기지 말고 삶아
가두어 놓은 논물에 산그늘이 내려앉는 계절입니다. 이미 모를 심은 논에도, 또 아직 모심기를 준비하는 논에도 살랑살랑 이는 봄바람에 산 그림자가 일렁이면 내 마음도 물결 따라 일렁입니다. 초록빛 산 그림자를 바라보며 짧은 사색에 빠져보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골살이의 낭만이겠지요. 때 아닌 사치를 부리는 것도 잠시, 돌아서면 일이고 돌아서면 일입니다.결단코 늦은 것이 아니라고 마음을 달래는데도 이미 일을 마쳐가는 마을 분들과 비교할라치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나이 드신 분들의 축소된 농사 규모와 우리집 농사는 애당초 비교의
보이는 대로 있는 대로 씨앗을 들이고 모종을 심고 혹시나 하늘 한 번 쳐다보다 다시 물을 주고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겨우내 풀숲에 숨어 있었을까 진딧물은 어디에서 그리 많이 나왔을까? 무당벌레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크기도 전에 다 빨아버리면 안되는데 싶어 손가락으로 쭈욱 개체수를 줄여본다. 이 일 저 일 호떡집에 불난 양 바쁘기 그지없다.지난 4월부터 언니네텃밭 생산자로 처음으로 농산물을 내기 시작했다. 신랑이 “빠끔살이 시작했네”란다. 그야말로 빠끔살이 농사를 시작한다.상추쌈을 먹다, 아욱국을 끓이다, 완두
몇 년 전 감자 가격 하락으로 팔지를 못해서 돼지를 먹인 적이 있다. 호박 가격이 떨어져서 퇴비장에 버린 적도 있었다. 팔지 못한 감자는 집에서 전분을 만들어서 팔았다. 전분을 만들면 저장기간이 길어지고 판매할 수 있는 기간도 길어진다. 신선한 감자로 만든 전분은 품질도 좋다.대부분의 농산물은 감자처럼 다량의 수분을 함유해서 저장성이 낮다. 감자는 여름에 주로 많이 생산된다. 각 지역마다 맛도 차이가 나고 날씨와 여건에 따라 크기와 모양도 달라진다. 이런 불규칙한 상황은 농산물의 수요와 공급에 많은 영향을 줘 가격 또한 변동이 심하
바깥말이라 불리는 우리 반은 열두 집 정도가 작은 골목 이쪽저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두, 세 집은 몇 년 전에 이사 왔고 나머지는 태어나거나 시집을 와 여태껏 살고 있으니 옆집 숟가락이 몇 개 정도인지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사이라 할 수 있습니다.저희 집을 중심으로 앞집, 양 옆집, 건넛집에 사시는 시어머니와 아주머님들 이렇게 다섯 분 정도가 가끔은 앞집에서, 왼쪽 옆집인 시댁에서 모이시기도 하셨지만 주로 오른쪽 옆집에서 웃고 떠들고 하셨습니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 잠이 깰 정도로 가까운 오른쪽 옆집. 겨우내 오른쪽 옆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