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우리 안의 미자씨

  • 입력 2019.07.21 18:00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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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초복을 지난 지금이 우리 지역에서는 제일 한가한 때인가 봅니다. 깨밭도 다 매고, 콩밭도 잡초가 못 자랄 만큼 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아직 고추는 익지 않아서 간간이 병해충 방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줄진 논바닥만 보일 정도로 벼가 자랐지만 항공방제를 하는 통에, 농약치고 약줄 잡으며 부부간에 싸우는 일도 이제 그 옛날 전설이 되고 말았네요.

이럴 때면 마을회관이나 정자나무 아래, 또는 도량 좋아 마음의 가시가 없는 사람의 집으로 일없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때마침 무성하게 자란 호박잎 아래 탐스럽게 매달린 호박을 따서 넓은 대야에, 온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을 수 있을 만큼 반죽을 갭니다.

다른 전과 달리 호박전은 약간 달큰한 맛이 나게끔 설탕도 조금 넣습니다. 만약 부추고추전에 단맛이 돌면 개나 주고 안 먹을 것을, 식재료에 따라 귀신같이 음식맛을 조화롭게 만들어내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모였으니 전만 먹을 리는 만무하고 내친 김에 지난겨울에 먹다가 얼려둔 물메기포도 물에 불려서 졸입니다. 장아찌나 갓 담은 열무김치도 내놓습니다. 얼렁뚱땅 장만한 음식이 주안상 아니 수라상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습니다.

대낮에 읍내 병원에 다녀오신 할머니께서는 곧장 눌러앉아 저녁까지 해결하고 집으로 들어가실 작정입니다. 이야말로 아직도 이어지는 농촌살이의 참 재미지요.

한여름 호박전 잔치를 주관한 이가 바로 미자씨입니다. 미자씨는 몇 해 전 남편분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셔서 혼자 농사일과 바다일을 하는 억척 여성농민입니다.

혼자 농사일을 하면서도 운전을 잘 해서 동네 어르신들을 목욕도 태워 다니고 오일장도 같이 다니며 인정을 베풀고 살기에 미자씨의 집은 언제나 사람이 북적댑니다. 어디로 멀리 나들이를 갈라치면 언제 올 거냐고 빨리 오라고 성화들이지만 미자씨는 귀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음지편 마을 미자씨의 행실이야 인근 사람들이 다 알도록 소문이 나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음지편 마을 뿐만은 아닙니다. 마을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일을 겁내지 않고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임하며 일머리를 잘 돌리는 우리들의 미자씨 말이지요.

그런 분들이야 말로 농촌 공동체를 유지·발전시키는 주체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혼자 사는 여성분들이 이런 역할을 잘 하더란 말입니다. 남편이나 가족의 시집살이를 끝낸 시점에 다시금 주변을 돌보고 챙기는 역할을 해내는 것이지요.

자처해서 돌봄 노동을 아끼지 않는 우리들의 미자씨는 곧 오래도록 주변을 돌봐온 여성농민의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농촌여성의 삶에서 스스로도 그러하거니와 다른 사람의 고단함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다다른 삶의 경지일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지 않고 무언가가 손쉽게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고 묵묵히 주변과 어울려 사는 미자씨의 삶에서 우리들의 삶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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