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쌀값 결정에 ‘농민’이 없다

농민이 주인인 협동조합, 쌀 수매가 결정은 ‘조합 맘대로’

농민 의사 반영 차단 … “쌀값 절대 오를 수 없는 구조”

  • 입력 2023.08.20 18:00
  • 수정 2023.08.20 18:23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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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최근 여주통합RPC(미곡종합처리장) 농민 배척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농협RPC의 쌀 수매가 결정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개를 들고 있다. 농민 의견을 배제한 채 자의적으로 진행하는 농협RPC들의 쌀값 결정 방식이 과연 온당한가 하는 지적이다.

여주통합RPC는 지난달 RPC 운영위원회(농민-농협 쌀값 협의기구)에서 일방적으로 농민 위원들을 퇴출했다가 농민들의 거센 지탄을 받고 지난 7일 시정조치했다(관련기사: 선거 끝나니 농민 걷어차는 여주 조합장들 / 여주통합RPC, 운영위원회에 농민대표 복구).

비록 물의를 일으키긴 했지만, 사실 여주통합RPC의 쌀값 결정 구조는 전국 실태에 비춰 상당히 선진적인 모델이다. 협의기구인 운영위원회에 농민 참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고, 의결기구인 이사회는 운영위의 협의사항을 가급적 그대로 수용한다. 쌀값 결정에 농민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해 보이지만 다른 지역에선 찾아볼 수 없는, 여주만의 독특한 사례다. 지역농협이 개별로 운영하는 RPC든 여주와 같은 지역 통합RPC(조합공동사업법인)든 수매가 결정은 이사회가 단독 결정하는 게 일반적이다. △일단 RPC에 아예 운영위원회를 두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운영위원회를 두더라도 농민 참여가 제한적이고 △농민 참여가 충분하더라도 수매가는 운영위원회 논의안건이 아니거나 △운영위원회에서 수매가를 논의하더라도 이사회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결론은 모두 농민 의사가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부·호서·호남·영남 할 것 없이 전국 대다수 농협RPC의 실태가 동일하다.

지난달 31일 여주시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여주통합RPC) 건물에 ‘농민 운영위원 배제’를 규탄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한 차례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여주통합RPC는 전국에서 유일하다시피 쌀 수매가 결정에 농협-농민 협의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RPC다.
지난달 31일 여주시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여주통합RPC) 건물에 ‘농민 운영위원 배제’를 규탄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한 차례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여주통합RPC는 전국에서 유일하다시피 쌀 수매가 결정에 농협-농민 협의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RPC다.

이같은 농협의 독단적 쌀값 결정 구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모순을 양산한다. 첫째, 생산자인 농민이 생산물의 가격 결정에 관여할 수 없다. 이는 도매시장 채소·과일 경매에서도 볼 수 있듯, 모든 생산물 중 오직 농산물에서만 나타나는 모순이다. 타의에 의해 결정된 가격은 생산자에게 생산비와 충분한 소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둘째, 농협의 본질인 협동조합 정신이 훼손된다. 농협의 주인은 농민이고 농협의 사업은 농민의 이익에 최대한 복무해야 한다. 하지만 실상 쌀값은 매년 농협이 정하는 가격에 농민들이 반발하는 구조로 고착돼 있다. 적어도 농협이 운영하는 RPC라면 농민들의 의사에 기반해 쌀값을 결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농민들의 참여로 쌀 수매가가 높아지면 농협RPC의 경영상황이 악화될 수도 있지만, 이 문제 역시 농협과 농민이 서로 설득하거나 사업방식을 바꿔가며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다. 적어도 현 체계하의 농협RPC는 국내 쌀 시장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동적으로 시장에 휩쓸리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김영준 여주시농민단체협의회 사무국장은 “대다수 농협RPC가 수매가를 정하지 않은 상태로 수매한 뒤, 팔아보면서 농협이 손해 안볼 만큼 수매가를 결정하고 있다. 생산비를 고려하지 않고 시장상황에만 따르니, 쌀값이 절대로 오를 수 없는 구조다”라고 탄식했다.

여주 외에도 ‘농협RPC 개혁’ 시도가 이뤄진 지역은 있다. 경북 경주 농민들은 2010년대 중반 경주통합RPC 쌀값 결정에 농민 의견을 반영코자 운영위원회 설치를 요구했고, 결국 운영위원회 설치 대신 이사회에 2명의 농민을 사외이사로 참여시켰다. 하지만 안건이 표결에 부쳐지면 2명이라는 숫자가 무의미해 미완의 개혁으로 남아있는 상태다.

사실 여주의 모델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여주통합RPC 운영위원회는 과거 RPC 부실운영이 불거졌을 때 농민들이 지난한 투쟁을 통해 만들어낸 기구다. 이사회가 운영위원회 협의사항을 무시하지 못하는 데 역사적 배경이 작용하고 있지만, 설령 어느 순간 이사회가 안면몰수하고 운영위 합의에 따르지 않더라도 규정상으론 하등의 문제가 없다.

즉 이 두 지역의 사례는, 농협RPC에 최소한의 농민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선 농민조합원들의 의지와 지역농협의 포용력이 전제돼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제도적으로도 단순한 ‘운영위원회 설치’, ‘사외이사제’보다 좀더 명확한 장치가 갖춰져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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