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물가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농민생존권 짓밟는 TRQ

  • 입력 2023.05.28 18:00
  • 수정 2023.05.29 07:05
  • 기자명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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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최근 기획재정부는 ‘시장접근 물량 증량에 관한 규칙’ 일부 개정안을 입법 예고해 양파 저율관세할당(TRQ)을 증량하고자 했다. 성출하기에 수입량을 증량한다는 것은 가격을 떨어뜨리려는 정부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농민들이 가장 바쁜 5월에 기습적으로 입법예고를 하는 의도 또한 불순하다. 농민들은 이달부터 다음 달까지 양파 수확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지난해 폭등한 농자재값과 전기료, 인건비 때문에 농업소득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에서 정부의 이번 조처는 이해를 하려 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부는 지난해 마늘이 한창 출하될 때 수입 마늘을 풀었다. 당시 창녕의 마늘 경매가 중단됐던 것을 벌써 잊었는지 모르겠다.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정해놓은 물량에 대해서는 저율 관세를 부과하거나 관세를 부과하지 않으면서 들여오고, 할당량보다 더 많은 양을 들여올 때는 고율의 세율을 적용한다. 그러나 규칙을 개정해서 할당량을 늘리는 것은 양파값을 잡겠다는 정부의 의도가 다분하다. 어디 양파뿐이랴? 마늘, 대파, 쌀 등 많은 농산물들을 수입하고 있고 이는 2022년에 쌀값이 45년 만에 최대폭으로 떨어진 이유기도 하다.

올해 마늘·양파값마저 폭락할까 우려가 된다. 가격이 떨어질 때는 느리게만 작동하던 정책들이 가격이 오를라치면 왜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시장접근물량의 증량에 관한 규칙을 바꾸는 것은 일회적인 피해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 규칙이 적용된다면 피해가 지속적일 것이고 종국에는 양파농업 자체가 붕괴될 것이다. 또한 다른 작목으로도 확대될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가 했던 말들 중에 시장의 기능에 맡긴다고 하는 것은 물량이 많아 가격이 쌀 때만 해당되는 상황이다.

국내산 양파를 생산하는데 농가가 들이는 비용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순소득은 계속해서 줄어드는 상황에 놓여있다. 농가들의 어려움은 나 몰라라 하면서 정부가 밀어붙이는 것은 국내 양파 생산 기반을 무너뜨리는 국가폭력이다. 소비자인 국민들에게 양파를 싸게 공급한다는 것을 명목으로 값싸게 수입을 하고, 양파 가격이 폭락해 농민들이 아우성치면 모르쇠로 일관한다. 결국 정부는 농민들에게 생산면적을 줄이라고 할 것이고 그 이후에는 농민들에게 양파 농사를 접으라고 얘기할 것이다. 1995년 WTO 출범 이후 쌀 이외 모든 농산물을 예외 없이 관세화 개방하기로 했고 낮은 가격으로 농산물이 수입될 경우 시장 교란과 국내 농가의 피해가 예상돼 국내 시장에 영향이 큰 중요 농산물은 정해진 물량만 들여오기로 했다. 고추, 마늘 등 자급도가 높은 양념류는 성출하기를 피해 수입하도록 했다. 성출하기가 가까워진 상황에서 저율관세의 수입 양파가 들어오면 양파값이 제대로 형성될 리 없다. 농민들의 실정에 대한 고려 없이 저율관세로 양파를 수입한다면 그것은 농민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다.

2022년 조생양파를 심어 생산비도 건지지 못했던 많은 농민들은 더디기만 했던 정부의 대책을 한탄했고 많은 손해를 스스로 감수했다. 지난해 가을 빚을 내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힘겹게 농사를 준비했고 올해 수확철이 다가와 조금 회복될까 하는데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어찌 정부의 정책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기후변화로 올해도 봄철 냉해와 병충해가 발생해 비용이 상승했고 양파 수확철 마다 폭등하는 인건비에 인력난은 농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또 값이 떨어진 농산물을 저장이라도 할라치면 오른 전기세를 감당하기 어렵다. 농사가 끝나고 수확을 하면 이제 결산을 해야 한다. 그동안 외상으로 구매했던 자재값과 이자도 농협에 상환해야 한다. 그리고 손에 쥔 농업소득으로 다음 수확기까지 버텨야 한다. 보통 양파와 같은 밭농사는 부부가 농사를 짓는다. 올해는 생활비를 벌러 아르바이트를 나가지 않아도 되려나 기대하는 것도 잠시, 또다시 피곤에 지치고 아픈 다리와 허리를 부여잡고 일자리를 찾아 생활비와 농비를 벌러 나가는 농민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참 씁쓸하다. 농사를 짓는 것으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물가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수입하는 TRQ와 할당량의 확대는 농민생존권을 짓밟고 있다. 우리 농업이 지속되고 주요 농산물의 자급률을 높여 먹거리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쇠퇴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를 부여잡는 정책이 아니라 기초농산물에 대한 국가 책임 농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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