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자본 주도 ‘생태학살’, 처벌 방안 논의할 때

  • 입력 2023.04.21 14:30
  • 수정 2023.04.23 20:07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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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제주 제2공항으로 가는 연계도로, 비자림로. 나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의 계획으로 줄 맞춰 심어졌다가 다시 인간의 계획으로 한날 한시에 죽어야 했다. 그 숲을 지키겠다고 시민들이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중략) 내일이면 잘려나갈 나무에다 새들이 둥지를 틀어 알을 낳는다. 이것이 학살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나와 당신과 우리도 이 새의 운명인 적이 있었다.”

지난 14일 세종시에서 열린 ‘4.14 기후정의파업’에 참가한 제주기후평화행진 활동가 엄문희씨의 발언이다. 엄씨의 이야기는 제주도가 제주 제2공항과 연계시키려는 비자림로를 ‘확장’시킨다는 명목하에 2018년 8월부터 비자림의 삼나무들을 베어내는 ‘생태학살’을 시작한 데 대한 이야기였다.

당시 애기뿔소똥구리·두점박이사슴벌레·붉은해오라기 등 8종의 멸종위기종 생물이 사는 비자림의 삼나무 915그루가 베어진 것에 반발하며, 제주도민들은 ‘비자림로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시민모임(시민모임)’을 결성해 비자림로 공사현장으로 간 이래, 지금까지도 비자림에서의 생태학살을 막고자 싸우고 있다.

규모화·생태계파괴형 농업과 연결된 생태학살

전북 군산시 새만금 지구의 수라갯벌. 곳곳에 쉬고 있는 철새들이 보인다. 새만금 간척사업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수라갯벌은 현재 새만금신공항 건설 추진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이와 같은 국가·자본 주도 ‘생태학살’을 처벌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북 군산시 새만금 지구의 수라갯벌. 곳곳에 쉬고 있는 철새들이 보인다. 새만금 간척사업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수라갯벌은 현재 새만금신공항 건설 추진으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이와 같은 국가·자본 주도 ‘생태학살’을 처벌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생태학살(ecocide)이란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계기는 1960~70년대 미국이 베트남전쟁 수행 과정에서 ‘베트콩의 은신처를 뿌리뽑겠다’는 명목하에 진행한, 고엽제 대량살포를 통한 베트남 밀림 파괴행위였다. 1969년 ‘신경제학 슈마허센터’에서 발간한 논문 <생태학살과 대량학살(genocide)의 경제학>에 따르면, 미국에서 상업용 종자, 화학비료, 살충제를 묶음으로 개발해 국내외적으로 보급함으로써 단기적으론 수익이 늘었지만, 장기적으론 토양과 환경에 치명적 악영향이 발생했다.

부농들이 농사 패키지 상품을 구입해 농작물을 대량생산한 후 헐값에 시장에 내놓았으므로, 가격경쟁력에서 밀리는 소농은 농토를 버리고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베트남에서 미군이 고엽제를 활용해 산림 제거작전을 벌인 것은 미국 농촌에서 반세기 전에 시작된 위와 같은 생태학살의 확대판이라는 게 해당 논문의 분석이었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이에 대해 “농업 에코사이드(생태학살)와 소농 말살이 함께 발생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후 생태학살 개념이 △서구의 식민지배로 비서구 토착민의 거주지가 수탈당하고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박탈당한 경우 △산업형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러 형태로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경우 등으로 확장됐다고 저서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에서 설명했다.

전자의 사례로 서구 자본이 동남아시아·아프리카 각지에 대규모 단일작물 재배농장(플랜테이션)을 건설해 토양·생태계를 훼손하고 주민을 착취하는 사례, 후자의 사례로 지금 우리나라 각지에서 국가·자본 결탁하에 신공항·케이블카·산업단지·석탄화력발전소 등의 건설로 자연생태계와 주민들이 살아가는 공간이 파괴되는 사례를 들 수 있다.

지구의 관점으로 심판하기

지난 9일 광주광역시 시립미술관에서 제14회 광주비엔날레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모의재판 '멸종전쟁'. ‘세대 간 기후범죄 재판소(CICC)'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열린 이날 재판에선 강원도 삼척, 베트남 하띤성에 건설 중인 석탄화력발전소 문제(피고 : 한국 정부, ㈜두산에너빌리티, ㈜포스코)를 다뤘다. 두산에너빌리티의 베트남 붕앙-2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에 맞서 불복종행동을 전개 중인 강은빈 청년기후긴급행동 대표(오른쪽)가 붕앙-2 발전소 건설 반대투쟁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지난 9일 광주광역시 시립미술관에서 제14회 광주비엔날레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모의재판 '멸종전쟁'. ‘세대 간 기후범죄 재판소(CICC)'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열린 이날 재판에선 강원도 삼척, 베트남 하띤성에 건설 중인 석탄화력발전소 문제(피고 : 한국 정부, ㈜두산에너빌리티, ㈜포스코)를 다뤘다. 두산에너빌리티의 베트남 붕앙-2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에 맞서 불복종행동을 전개 중인 강은빈 청년기후긴급행동 대표(오른쪽)가 붕앙-2 발전소 건설 반대투쟁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주변에 배치된 동물 그림에 쓰인 글자들은 '동지'를 뜻하는 각국의 단어들이다.

한국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엔 아직 생태학살을 단죄할 실정법은 없다. 기후위기 심화 상황에서 늦게나마 세계 각국에서 생태학살 단죄방안의 논의가 이뤄지는 중인데, 이와 관련해 최근 국내에서도 흥미로운 일정이 있었다.

지난 7~9일 광주광역시 시립미술관에선 제14회 광주비엔날레 행사의 일환으로 모의재판 '멸종전쟁'이 열렸다. 영국의 법학자·작가인 라자 드 수자 교수가 주도하는 프로젝트 ‘세대 간 기후범죄 재판소(CICC)’의 일환으로 열린 이 재판에선 △새만금신공항 건설을 통한 군산 미군기지 확장문제(피고 : 한국 정부) △한국의 무기산업 문제(피고 : 한국 정부, ㈜한화) △강원도 삼척, 베트남 하띤성에 건설 중인 석탄화력발전소 문제(피고 : 한국 정부, ㈜두산에너빌리티, ㈜포스코) 등이 다뤄졌다.

모의재판에 참가한 ‘사람’뿐 아니라 지구상의 다른 ‘생물’들도 배심원임을 강조하고자, 재판정엔 여러 동식물의 그림을 배치한 뒤 각 그림에 ‘동지’를 뜻하는 세계 각국의 언어를 표시했다. 국가와 기업이 저지른 기후범죄 및 생태학살의 기소를 목표로 하는 이날 재판에선 드 수자 교수가 마련한 대안법인「세대 간 기후범죄법」에 의거해, 배심원단 전원이 생태학살 주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인간의 관점만이 아닌 자연과 생태계, 지구의 관점에선 이들의 생태학살 행위가 유죄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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