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서 사라지고 있는 ‘관지미마을’

  • 입력 2023.03.24 09:38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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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 일명 ‘관지미마을’. ‘배산임수’의 입지, ‘문전옥답’의 절대농지를 품고 있던 고즈넉한 농촌마을의 형체가 뒷산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여전히 산업단지 개발 중단을 촉구하며 3년째 싸우고 있지만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를 조성하려는 충북도와 진천군, 시행사는 주민들의 호소에도 아랑곳없이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지난 21일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바라본 마을은 말 그대로 ‘살풍경’이었다. 한승호 기자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 일명 ‘관지미마을’. ‘배산임수’의 입지, ‘문전옥답’의 절대농지를 품고 있던 고즈넉한 농촌마을의 형체가 뒷산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여전히 산업단지 개발 중단을 촉구하며 3년째 싸우고 있지만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를 조성하려는 충북도와 진천군, 시행사는 주민들의 호소에도 아랑곳없이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지난 21일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바라본 마을은 말 그대로 ‘살풍경’이었다. 한승호 기자

작은 마을을 푸근하게 감싸주던 뒷산이 시뻘건 흙더미로 변했다. 동식물이 죽거나 떠나버린 자리에 널찍한 길이 닦였고, 그 길로 공사차량이 들어가 매일같이 산을 헤집는다. 평생을 정들었던 새 소리, 풀벌레 소리 대신 중장비 소리가 바로 집 뒤에서 주민들을 겁박한다. 진천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사업 예정 부지인 충북 진천군 이월면 관지미마을.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고령의 주민들이 3년째 한 주도 빠짐없이 군청 앞 수요집회를 벌이고 있지만, 소유권이 개발업체로 넘어간 산지부터 공사는 보란 듯이 진행 중이다.

지난 21일, 오늘도 분주한 뒷산의 중장비들을 뒤로하고 관지미 주민들은 군청이 아닌 도청으로 향했다. 충청북도 지방토지수용위원회가 열리는 날. 남아있는 마을 토지들의 강제수용을 결정하는 회의인 만큼, 거동할 수 있는 모든 주민이 신발끈을 고쳐 매고 나섰다.

“개발독재·군사독재 시절도 아니고 사유재산을 맘대로 수용한다는 게 납득이 안 간다. 더구나 국가산업단지도 아니고 대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한 것인데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 현수막 끈을 동여매는 팔순 농민의 주름진 손. 조끼를 입고 팻말을 들고, 관청과 시민들에게 던지는 처절한 목소리. 3년의 투쟁으로 이제는 익숙해진 일들이지만, 그 절박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을의 운명이 촌각에 달렸지만 주민들이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현재 시행사 측의 부지 취득률이 얼마인지는 고사하고 토지수용위원회 수용재결 기준인 ‘75%’를 넘겼는지 여부조차 철저히 비공개며, 이날 토지수용위원회 역시 ‘비공식적 누설’이 있기 전까진 회의 시간과 장소조차 알 수 없었다. 이날 주민들의 도청 방문은 철저하게 주민들이 배제된 판세 속에서 토지수용위원회에 최소한의 입장 전달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발걸음은 도청 현관 앞에서 가로막혔다. “토지수용위원장에게 서면으로 입장을 전달했지만 제대로 전달됐는지 알 수 없다. 위원장이 과연 우리의 존재 자체라도 알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시행사나 진천군과는 수시로 대화하고 밥 먹으면서 우린 찾아와도 얘길 들어주지 않느냐.” 주민들은 최소한 토지수용위원장이라도 만나게 해달라며 길을 막아선 도청 관계자들과 현관에서 대치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신체적 충돌이 일어나고 현관 유리가 파손되는 등 갈등이 격화되기도 했다.

토지수용위원회 회의는 허무하게 끝났다. 주민들이 청사 정문 현관에서 항의하는 사이, 충북도는 위원들을 옆문으로 맞이하고 방문을 걸어잠근 채 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회의는 개의한 지 불과 5분 만에 끝나버렸다. 회의를 마친 위원들은 마찬가지로 주민들을 피해 옆문으로 청사를 빠져나갔다.

더욱 답답한 것은 이 회의 결과를, 당사자인 주민들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5분 회의’ 소식에 분을 삭이지 못하는 주민들 앞에 주무과장이 불려왔지만 “규정상 회의 자체가 비공개며 논의 내용도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힐 뿐이었다. 주민들은 회의 전 최소한의 의견 개진과, 회의 후 결과 확인을 하고 싶었을 뿐이지만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충북도와 진천군의 주장처럼, 이번 산단 추진 과정에 ‘절차상 하자’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차를 얼마나 탄력적이고 합리적으로 집행할지는 행정가와 위정자들의 역량 또는 관점에 달렸고 이것을 움직이는 힘을 우리는 ‘정치력’이라 부른다. 농업진흥지역이 대거 물려 있는 데다 실거주민 전원이 반대하고 있는 이 산단 개발은 제반 상황에 비춰 너무나 쉽게 추진되고 있으며, ‘정치력’이 없는 주민들의 목소리는 절차를 핑계로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다. 절차상 하자는 없을지언정 결코 정의롭다고 할 수 없는 행정이다.

개의 5분 만에 끝낸 회의라 재결을 유보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주민들은 행정이 보여준 지금까지의 행보에 비춰 결과를 비관하는 분위기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진행할 줄은 몰랐다. 지금으로선 토지수용이 재결된 걸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내 무덤’이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힘 모아 싸우겠다.” 주민대책위원장의 단호한 결의는, 관지미의 싸움이 조금도 매듭지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 일명 ‘관지미마을’. ‘배산임수’의 입지, ‘문전옥답’의 절대농지를 품고 있던 고즈넉한 농촌마을의 형체가 뒷산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여전히 산업단지 개발 중단을 촉구하며 3년째 싸우고 있지만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를 조성하려는 충북도와 진천군, 시행사는 주민들의 호소에도 아랑곳없이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지난 21일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바라본 마을은 말 그대로 ‘살풍경’이었다. 한승호 기자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 일명 ‘관지미마을’. ‘배산임수’의 입지, ‘문전옥답’의 절대농지를 품고 있던 고즈넉한 농촌마을의 형체가 뒷산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여전히 산업단지 개발 중단을 촉구하며 3년째 싸우고 있지만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를 조성하려는 충북도와 진천군, 시행사는 주민들의 호소에도 아랑곳없이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지난 21일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바라본 마을은 말 그대로 ‘살풍경’이었다.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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