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복되고 냉해 입어도 … 국산 밀은 희망이다

마을 단위 초보 밀 생산단지, 장흥 북리영농조합법인

연이은 시행착오 불구, 밀 통해 화합과 미래가치 공유

  • 입력 2022.10.30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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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북리영농조합법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유철웅씨가 새로 지은 법인 사무실 및 창고 건물을 소개하고 있다.
북리영농조합법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유철웅씨가 새로 지은 법인 사무실 및 창고 건물을 소개하고 있다.

전남 장흥군 회진면 덕흥리(북리). 귀농인 없이 지역 토박이들이 거주하면서도 40~50대 젊은 농민들이 즐비한 독특한 마을이다. 하지만 독특한 건 연령분포뿐, 마을의 문화나 영농형태는 여느 농촌마을과 다를 바 없이 건조하고 투박했다. 그런 덕흥리에서 젊은 농민들이 한 곳을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그 동력은 바로 국산 밀이다.

덕흥리의 ‘북리영농조합법인’은 처음부터 밀을 염두에 두고 만든 법인은 아니다. 마을에 변변한 농사 장비나 공동시설 하나 없었던 터라 정부 지원사업을 유치하고자 2020년 법인을 만들었는데, 때마침 정부가 국산 밀 육성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자 여기에 참여한 것이다.

밀에 관해선 초짜였지만, 다행히 같은 지역에 밀농사를 이끌어줄 ‘멘토’가 존재했다. 전국 최고 품질의 밀을 생산하는 ‘햇살농축산영농조합법인’이다. 덕흥리의 젊은 농민들은 지역 선배들이 운영하는 햇살농축산의 재배매뉴얼을 도입해 2020년 가을부터 밀농사에 뛰어들었다. 기본적인 재배매뉴얼을 공유하되, 마을 풍토에 가장 적합한 재배방법을 찾기 위해 각자가 나름의 고민을 투영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덕흥리의 밀 농사는 2년 연속 실패했다. 첫해(2020~2021년)엔 장흥에서도 유독 이 마을에만 광범위한 도복 현상이 발생해 밀의 품질이 크게 떨어졌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품종(새금강)과 잦은 비의 영향으로 추측하고 있다.

2년차(2021~2022년)엔 지난 3월 장흥지역 전체를 휩쓴 냉해에 속절없이 주저앉았다. 첫해엔 수확량이라도 받쳐줬지만 이번엔 30%나 감산됐다. 보험금의 효용성보다 보험료 할증의 부담이 더 큰지라 보험처리조차 하지 못했다. 야심차게 시작한 밀농사건만 좀체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밀에 대한 덕흥리의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올해 영농법인 사무실과 공동창고까지 준공하며 오히려 한층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밀은 정부수매를 기반으로 보리·조사료 등 기존의 벼 이모작 작물들보다 안정적 가격으로 수매가 가능하고, 최근 각광받고 있는 분질미(가루용 쌀)와는 작기가 더욱 절묘하게 맞물린다. 국가 식량자급률 제고의 핵심 열쇠라는 점에서 자부심도 보장된다.

그동안 익숙하고 뻔한 작물들로 농사를 이어오던 덕흥리에 밀이 미래 비전을 제시하며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15명의 젊은 농민이 ‘선발대’ 격으로 먼저 밀에 뛰어들었지만, 나머지 마을 주민들도 후발 참여를 위해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이중호 덕흥리 이장은 “힘든 상황에서도 주민들이 잘 단합하고 있다. 정부의 관심과 의지만 계속 뒷받침된다면 밀농사는 충분히 지속될 수 있을 거라 본다”고 말했다.
 

덕흥리 농민들은 본래 따로따로 자기 농사를 지어왔지만, 밀을 매개로 단합하기 시작한 뒤론 밀 이외에 다른 농사나 마을 행사에도 힘을 모으고 있다. 사진은 한 사람의 논에 콤바인 세 대를 한꺼번에 투입해 품앗이하고 있는 모습. 북리영농조합법인 제공
덕흥리 농민들은 본래 따로따로 자기 농사를 지어왔지만, 밀을 매개로 단합하기 시작한 뒤론 밀 이외에 다른 농사나 마을 행사에도 힘을 모으고 있다. 사진은 한 사람의 논에 콤바인 세 대를 한꺼번에 투입해 품앗이하고 있는 모습. 북리영농조합법인 제공

덧붙여, 비전보다 더 중요한 건 밀농사를 통해 회복된 마을의 공동체의식이다. 마을 사람 누구도 경험이 없던 밀농사를 맨바닥에서 시작하려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일이 많아진 건 당연지사. 수차례의 회의·토론·교육을 통해 얼굴 마주할 일이 늘어나고, 소통이 활발해지고, 밥 한 끼라도 더 같이 먹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공동구매·공동방제 등 밀농사에서야 공동작업이 이뤄지는 게 당연지사지만, 밀농사를 떠나서도 공동작업이 일상화되고 있다. 각자 자기 논 작업에 바빴던 주민들이 한 논에 콤바인 세 대씩을 동원해 함께 벼를 수확하고 건조기·운송차량을 공유한다. 어르신 생신잔치, 도로정비 등 마을 행사에도 참여도가 부쩍 높아졌다.

주민 유철웅씨는 “예전엔 각자가 다 따로따로였는데, 밀농사를 같이 하면서 마을에 생기가 넘치는 것 같다. 작업을 함께 하면 효율도 좋아지지만,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 재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국산밀은 지난 반세기 동안 시장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여전히 매우 비중이 빈약한, 암담하기 짝이 없는 작목이다. 하지만 시선을 달리하고 미래를 생각하면 비로소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국산 밀이야말로 수입 밀이 장악한 국내 밀 시장을 파고들어 우리 농업에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기대주일 뿐 아니라, 덕흥리의 사례처럼 농업·농촌 현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기도 하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취재·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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