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식량 ‘안보’ 아닌 식량 ‘주권’이 필요하다

  • 입력 2022.06.05 18:0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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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2015년 2월 ‘2015 우리농업지키기 소비자 10만인대회 조직위원회’ 회원들이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10만인대회 추진 선언 기자회견에서 ‘우리 농업, 소비자가 지킨다’는 의미를 담아 수입농산물 대신 우리농산물로 밥상을 차리는 상징의식을 펼치고 있다. 한승호 기자
2015년 2월 ‘2015 우리농업지키기 소비자 10만인대회 조직위원회’ 회원들이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10만인대회 추진 선언 기자회견에서 ‘우리 농업, 소비자가 지킨다’는 의미를 담아 수입농산물 대신 우리농산물로 밥상을 차리는 상징의식을 펼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미국이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를 활용해 중국과 동아시아에서 패권 대결을 추진하려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농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더이상 신냉전의 한복판으로 끌려가면 안 된다는 것과 함께, 우리 스스로 식량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압박에 한국도 자유롭지 않다

미국의 세계농업전략을 봐도 알 수 있듯이, IPEF 추진 시 미국은 자국 농업계의 압력에 따라 한국 정부에 대대적인 ‘변화’를 촉구할 공산이 크다. IPEF 출범 이야기가 나온 직후부터 미국 내에선 농업계가 농무부(USDA), 무역대표부(USTR) 등 정부 측에 압력을 넣었다.

자국 농업계의 압력과 별개로, USTR은 계속해서 타국의 ‘무역장벽 해소’를 압박해 왔다. 이는 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유전자조작농산물(GMO) 문제와 관련해, USTR은 지난 3월 발표한 ‘2022 대외 무역장벽 보고서’에서 한국의 ‘농업생명공학(GMO 관련 기술) 규제체계’에 대해 “미국의 농산물 수출에 계속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새로운 생명공학 작물 품종에 대한 (한국 정부의) 승인 절차는 중복 검토와 과도한 데이터 요청을 포함하는 비효율성으로 인해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중략) 미국과 민간산업계는 프로세스(GMO 관련 승인과정)를 개선하는 방법에 대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바이오기술 검토를 위한 간소화된 프로세스 시험 목적의 시범 프로젝트를 개발했다. (중략) 미국은 2020~2021년 내내 (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련 기관과 여러 차례 논의했으며, 농업생명공학 승인 절차 개선을 위해 한국과 지속적으로 협력할 예정이다.”

한국의 GMO 반대 시민사회는 최근 산자부에 ‘유전자가위기술의 비(非)GMO화’를 부추기는「유전자변형생물체의 국가 간 이동 등에 관한 법률」규제완화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면서, 산자부 등 정부 당국의 ‘시민 소통부재’를 비판한다. USTR 보고서대로라면, 한국 정부는 우리나라 국민과의 소통보다 미국 측 관계자들과의 소통에 더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서 2022 몬산토·바이엘 GMO반대 시민행진 참가자들이 'GMO 규제완화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달 2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서 2022 몬산토·바이엘 GMO반대 시민행진 참가자들이 'GMO 규제완화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대국 주도 ‘블록경제’는 위험하다

김은진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세계 각국은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대결을 목도하며 신냉전 속으로 빨려들어가지 않고자 자구책을 강구 중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대금 결제수단을 달러 대신 위안화(중국 화폐단위)로 바꾸는 걸 검토 중이며, 서방 국가 중에도 러시아와의 천연가스 거래를 위해 미국 주도 대(對)러시아 제재 참가에 미온적인 나라들도 나타나는 중”이라며 “윤석열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식량주권에 대한 고민도, 한반도 정세에 대한 고민도 없이 IPEF에 가입했다. 그야말로 대미 사대주의적 행보”라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유럽연합(EU)의 경우 미·중 전략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대서양동맹'을 유지하면서도 2020년 말 중국과 포괄적 투자협정(CAI)을 맺고, 매년 정기적으로 EU-중국 전략전망을 발간하는 등 중국과의 협력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한도숙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신냉전 및 기후위기 등의 악재로 식량위기 심화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미국은 IPEF를 통해 중국·러시아 등 경쟁국가를 배제한 자국 주도하의 공급망을 조성해,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와 ‘표준’을 만들어 교류를 추진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한 전 의장은 “세계질서를 양극화시켜 자기네 ‘블록’ 안에 들어온 패거리만 챙기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식량 ‘안보’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쨌든 ‘공급망’ 내에서 GMO든, 미국산 유제품이든 큰 문제 없이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량 ‘주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특정 강대국 주도하의 ‘블록경제’ 체제는 해당 강대국 및 또 다른 블록 가담국가(IPEF의 경우 일본·호주 등)들에 대한 ‘식량 주권 예속’ 및 ‘먹거리 안전성 위협’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크다는 게 농업·농촌·농민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진단이다.

김은진 교수는 “지금 우리에겐 식량 ‘안보’가 아닌 식량 ‘주권’이 필요하다”며 2007년의 역사적 경험을 이야기했다.

“1996년 비아캄페시나의 주도로 식량안보의 대응논리인 ‘식량주권’이 만들어졌지만, 이 개념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7년 2월 말리의 닐레니라는 곳에서 80여개 나라의 민중들이 모여 식량주권 선언(닐레니 선언)을 발표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2007~2008년, 곡물 주산지의 기상여건 악화와 미국발 금융위기 등 여러 요인으로 전 세계가 식량가격 폭등에 따른 위기를 겪은 바 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식량주권 담론이 확산됐다. 이런 역사를 교훈 삼아, 우리는 강대국 주도하의 국제분업체계를 거부하고 농지보전, 식량자급률 확보, 계획생산이 담보되는 체계적 먹거리계획(푸드플랜), 남북 간 통일농업 실현 등을 통해 식량주권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농민이 짓고 싶은 농사를 보장하는 게 ‘농민기본권’

미·중 대결구도 심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통상협정의 정치화’에 대응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경제·통상적 논리를 놓쳐선 안 된다는 지적은 기존부터 제기됐다. 지역 다자협력 과정에서 비(非)배타성 원칙을 지키고 경제통상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미·중 간에 전개되는 ‘경쟁적 보호주의’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어느 한쪽의 편을 들 것을 고민할 게 아니라, 우리 자체의 적극적 산업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진단도 유효하다.

한편으로 최강대국 미국이, 한국 입장에선 부정적 방향으로 작용하는 요구임과 별개로 자국 농민단체들의 요구를 상당 부분 귀담아들으며 ‘자국 농민 우선시 정책’을 펼치는 것과 관련해, 한도숙 전 의장은 “우린 그렇다면 미국 뜻만 따르지 말고 더더욱 우리 농민들을 위한 보호책을 강력하게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 농민이 짓고 싶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는 게 급선무다. 친환경농사를 지으려는 농민이 있다면 직불금 강화로든, 관련 기술 지원으로든 우선 그 농민이 안정적으로 농사지을 수도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공공급식에서의 친환경농산물 공급 확대를 통해 농민에게 안정적 판로를, 시민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엄연히 우리의 식량주권 영역에 해당한다. 농민이 짓고 싶은 농사를 짓는 것을 ‘기본권’으로서 보장하는 게 국가 책임농정이며, 식량주권 실현의 첫걸음 아닐까.”

※ 참고자료 : 신종호·전병곤 외, <미중 전략경쟁과 한국의 대응 : 역사적 사례와 시사점>(통일연구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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