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냉전 시대, 미국의 농업·먹거리분야 세계전략은?

  • 입력 2022.06.05 18:00
  • 수정 2022.06.06 22:19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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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서 미국은 농업 분야에 어떤 식으로 개입할까?

미국은 IPEF의 ‘4개의 기둥’ 중 ‘공정하고 복원력 있는 무역’ 부문에서 ‘지속가능한 농업’에 대한 공통의 규범을 만들겠다고 표방한다. 그러나 IPEF의 구체적 내용은 아직 안 나온 상태에서, 우리는 21세기 미국의 농업·먹거리분야 세계전략 및 미국 국내 농업계의 요구부터 살피며 향후 미국이 어떤 요구사항을 내밀지 예측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곡창지대’

지난달 1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일리노이 주 캉커키의 한 농장에서 가진 농민들과의 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당신들은 이 나라의 중추다. 과장이 아니다. 당신들은 또한 세상을 먹여 살린다. 그리고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푸틴(러시아 대통령)의 전쟁을 보고 있다. 당신들은 자유(freedom)의 중추와 같다.”

“나는 오늘 ‘민주주의의 곡창지대(The breadbasket of democracy)’인 미국 농부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우크라이나에 저장된 2,000만톤의 곡물이 타국으로 수출되지 못해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사(餓死)할 상황을 우려하며, 식량위기 해결을 위해 미국 농민들이 역할을 맡아달라고 요구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해당 발언은 아무 맥락 없이 나온 게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한 달째였던 지난 3월 23일, 미국농민연맹(AFBF)·북미곡물수출협회·전미오일시드정제업협회 등 미국 농민단체들, 엄밀히는 시장지향적 농업정책 확대를 촉구하는 농업계 로비단체들은 톰 빌색 미국 농무부(USDA) 장관에게 “보존유보계획(CRP) 대상 농지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CRP란 농무부가 추진하는 환경보전형 농업정책이다. 농무부는 CRP를 통해 토양침식도가 높은 농지에서 10년간 휴경이 이뤄지도록 규제하는 대신, 해당 농지를 소유한 농민에게 매년 표토 보전비용의 50%와 임차료를 지불함으로써 농지 상태 회복, 야생동물 서식처 마련, 과잉생산 억제 등을 추구하는 정책이다.

그렇다면 왜 AFBF 등의 단체는 빌색 장관에게 CRP 규제완화를 촉구했을까? 해당 단체들은 서한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이 5주째로 접어들면서, 이번 전쟁이 세계 식량안보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략)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곡물·해바라기 (수출) 손실을 상쇄하기 위해 더 많은 곡물과 기름씨앗(Oilseed, 면화씨·해바라기씨·콩으로부터 짜내는 기름)을 생산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급하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6일, 농무부는 올해 1차 보금자리 기간(새를 비롯한 야생동물 서식을 위해 농지를 그대로 방치하는 기간) 뒤 CRP 계약 마지막 해를 맞은 농민 한정으로 CRP의 자발적 종료 신청이 가능토록 규제를 완화해, 해당 단체들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였다. 대상 농민들은 자발적 종료 승인 뒤 제초·건초 및 경작준비를 진행할 수 있다. ‘푸틴의 부당한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식량 공급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규제를 완화했다는 게 농무부의 입장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농민들을 ‘민주주의의 곡창지대’라고 칭송한 것은 위 농무부의 규제 완화 건과 함께 자국 농업계의 ‘식량 공급망 확보’ 요구에 대한 미국 정부의 화답이었다.

바이든정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래 타국에 팔 농산물 생산 목적으로 △미국 밀 생산량 증대를 위한 5억달러 투자 △이모작 보험을 제공하는 카운티(행정구역 단위) 수 50% 이상 증대 △비료 생산을 위한 보조 프로그램을 2억5,000만달러에서 5억달러로 증액 등의 정책을 발표했다.

식량원조도 ‘편가르기’ 수단으로 활용하는 미국

미국 농무부 누리집에 실린 미국 대외원조 프로그램의 대상 국가들. 미국은 대외원조 프로그램 또한 자국 패권 실현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이란·베네수엘라 등 미국과 갈등을 빚는 나라들은 식량위기가 발생해도 원조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 농무부 제공
미국 농무부 누리집에 실린 미국 대외원조 프로그램의 대상 국가들. 미국은 대외원조 프로그램 또한 자국 패권 실현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이란·베네수엘라 등 미국과 갈등을 빚는 나라들은 식량위기가 발생해도 원조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 농무부 제공

미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부터 ‘세계 식량문제 해결’을 표방하며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외원조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농무부 주도로 진행되는 개발도상국 농업현대화 프로젝트인 ‘발전을 위한 먹거리(Food for Progress) 프로그램’, 대외 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가 진행하는 기아퇴치·식량안보 협력체계인 ‘피드 더 퓨처(Feed the Future)’ 등이 이에 해당된다. 특히 피드 더 퓨처와 관련해,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열린 국제연합 식량정상회의에서 5년간 연간 5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눈여겨볼 점은 이러한 미국 대외원조 프로그램의 이념성이다. 피드 더 퓨처 등 주요 원조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USAID는 국무부 산하이며, 국무부 장관의 전반적 대외정책 기조에 따라 활동하는 기관이다. USAID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확산을 통한 미국 외교정책상의 이익 실현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 지원 △빈곤 감소 등을 활동 목표로 삼는다.

달리 말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확산’ 및 ‘미국 외교정책상의 이익 실현’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면, 미국은 아무리 식량위기가 심각한 나라라도 원조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는 옛 냉전기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이 심화될수록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원조금액을 늘렸는데, 이는 아프리카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실제로 1980년대 미·소 간 대결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1억달러 안팎을 오갔던 미국의 아프리카 대외원조 금액은, 탈냉전기였던 1990년대 후반엔 5,000만달러 안팎으로 줄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미국이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면서, 미국의 아프리카 원조금액은 2억달러 가까이 치솟았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이 최근 대외원조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이유 중엔 ‘신냉전 구도 강화’도 포함된다. 과거의 대결 상대가 소련이었다면, 지금은 중국이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11월 29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 장관급 회의에서 ‘중국-아프리카 협력 비전’을 발표했는데, 그 일환으로 중국은 아프리카에서 빈곤 완화 및 농업 관련 프로젝트 10가지를 시행하고, 이를 위해 농업 전문가 500명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중국은 아프리카 농산물의 중국 수출을 위해 ‘녹색통로’를 개설하고 향후 3년간 아프리카에서 3,000억달러 가량의 농산물을 수입하겠다고 언급했다. 위 역사적 전례 및 최근 미·중 양국의 세계전략을 고려하면, 아프리카에서 미·중 간의 '원조대결'이 가속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의 원조정책은 철저히 ‘이념지향적’이기에 ‘선택적’이기도 하다. 대표적 ‘반미국가’로서 미국의 경제제재에 시달리는 이란·베네수엘라 등의 국가에서 식량위기가 벌어져도 미국은 모른 체 한다. 2020년 이란 연구자들이 <국제보건정책 및 관리 저널(IJHPM)>에 실은 보고서 ‘미국의 이란 제재 재부과가 이란 식량안보에 미친 영향’에 따르면, 2017년 5월 12만6,440리알(이란 화폐단위)이었던 이란의 쌀값은 미국 제재 재부과 뒤인 2019년 5월 약 20만6,097리알로, 바나나 가격은 같은 기간 동안 약 5만1,977리알에서 14만1,352리알로, 양파는 1만8,950리알에서 7만3,802리알로 폭증했다. 경제제재로 식량부족 사태가 심화됨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장 GMO를 구입하지 못할까?

2015년 2월 ‘2015 우리농업지키기 소비자 10만인대회 조직위원회’ 회원들이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10만인대회 추진 선언 기자회견에서 ‘우리 농업, 소비자가 지킨다’는 의미를 담아 수입농산물 대신 우리농산물로 밥상을 차리는 상징의식을 펼치고 있다. 한승호 기자

2013년 4월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열린 ‘FTA 대책 마련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붉은 머리띠를 맨 한 농민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대(對)중국 압박 성격의 IPEF는 이상과 같은 미국의 대결주의적 세계전략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미국과 우호적 관계인 나라들은 미국의 농업분야 세계전략으로부터 안전할까? 그렇지만도 않다.

미국은 지난해 캐나다가 미국-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USMCA)에 따라 미국산 유제품을 관세 할당량(TRQ)에 맞춰 더 수입해야 했음에도 캐나다가 TRQ 조작을 통해 미국 유제품 수입을 가로막았다며 무역분쟁조절 절차에 돌입했다. 지난달 미국 국제낙농수출협회 및 미국유제품수출위원회 등의 단체들은 “캐나다에 대한 (무역)보복이 필요하다”며 미 농무부를 압박했고, 이에 톰 빌색 장관도 “캐나다의 대응에 실망했다”며 캐나다에 미국산 유제품 수입량을 늘리라고 압박 중이다.

아프리카 국가 중 미국과 관계가 긴밀한 축인 케냐는 미국의 유전자조작농산물(GMO) 규제 완화 압박에 직면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발간한 ‘2022 대외 무역장벽 보고서’에서 “케냐의 유전자편집(유전자가위) 산물 금지조치가 미국의 식량 원조와 농업생명공학에서 파생된 농산물 수출을 모두 차단했다”고 언급했다. 케냐는 2012년 11월부터 GMO 작물의 수입·재배를 금지해 왔는데, 이 조치로 인해 미국 GMO 개발기업들의 GMO 산물 판매에 차질이 생긴다는 게 USTR의 입장이다.

※참고자료

정구연, <미국의 아프리카 대외원조정책 연구 : 원조와 안보의 연계를 중심으로>(고려대학교 일민국제관계연구원, 2013)

이효정, 윤자영, <미국의 농업분야 국제개발협력 전략과 시사점>(한국농촌경제연구원, 2021)

잘랄 헤자지, 사라 에맘골리푸르, <미국의 이란 제재 재부과가 이란 식량안보에 미친 영향(The Effects of the Re-imposition of US Sanctions on Food Security in Iran)>(국제보건정책 및 관리 저널(IJHPM),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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