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개기·투기로 얼룩진 제주 농지, 임차농은 더 설 곳이 없다

  • 입력 2021.07.25 18:00
  • 수정 2021.07.25 19:19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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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의 한 투기 의심농지에 현수막으로 멀칭한 채 방치된 묘목들이 보인다. 한켠은 인근 자동차 수리소의 고장 차량들이 차지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6월 출범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제주도연맹의 농지대책특별위원회는 농민회원들을 통해 제주 전역에서 농지법이나 보조금법을 위반한 부재지주를 제보받고 있다. 지난 16일 제주 성산읍 일대에서 진행된 현장조사와 농지대책특별위원회 2차 회의를 통해 제주 농민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제주식 신농법 ‘현수막 멀칭’

제주 제2공항 건설이 예정된 부지 인근인 성산읍 신산리에는 수많은 투기 의심 농지가 존재한다. 우선 ‘투기농지의 대표적인 예’를 보고자 성산읍농민회의 안내를 받아 신산리 일대를 돌아봤다.

이날 찾은 신산리의 한 농지는 대리경작자를 찾던 지주의 움직임이 지역 농민회원에게 포착되는 바람에 조사망에 걸려들었다. 이 농지의 일부는 인근 자동차 수리소에서 차량 적치 장소로 사용하고 있어 한눈에 봐도 농지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결국 경작자를 구하지 못해 농사를 짓는 시늉만 해둔 농지의 모습이다. 한쪽에선 말 그대로 수풀이 무성해 임야와 같은 모양을 띠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구역에선 비닐이 아닌 현수막으로 멀칭을 해 나무를 심어둔 곳도 있어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현장조사를 위해 이곳을 둘러본 고권섭 전국농민회총연맹 제주도연맹 의장은 “이거 농막이라고 컨테이너 하나 갖다 놓고, 쓰지도 않을 무화과·사철나무 조금 심어 놓고 농사한다고 하는 것”이라며 “제주의 새로운 농법이라 불러달라”라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렇게 대놓고 꾸며놓거나 아예 경작하지 않는 농지는 아무리 투기가 많은 제주라고 해도 그렇게 흔하지는 않았다. 지난 2015년부터 자체 농지이용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는 제주도가 실제 경작 여부만큼은 눈여겨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워낙 투기 열풍이 거세다 보니 이렇게 ‘허술한 사례’들도 점점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빙산의 일각과 같이 말 그대로 눈에 띄는 일부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겉보기엔 멀쩡할지언정 그 속은 경자유전의 원칙과는 전혀 거리가 먼 농지들이 제주에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눈으로만 봐서는 임차를 통해 전과 같이 농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농민들이 들고일어날 정도로 곪다 못해 썩어버린 제주 농지의 현실이 보인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제주도연맹 농지대책특별위원회가 제보 받은 한 투기 의심농지의 등기부 등본. 이 농지를 구매했던 부동산업자의 사업자 형태가 농업회사법인으로 돼 있다. 한승호 기자
전국농민회총연맹 제주도연맹 농지대책특별위원회가 제보 받은 한 투기 의심농지의 등기부 등본. 이 농지를 구매했던 부동산업자의 사업자 형태가 농업회사법인으로 돼 있다. 한승호 기자

 

1,600평 밭 한 필지, 지주만 수십 명

같은 날 열린 농지대책특별위원회 2차 회의에선 눈에 띄는 자료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단 한 곳의 부동산을 상대로 무려 44건의 제보가 들어 온 것이다. 상호가 ‘OO부동산’인 이곳의 사업자 형태는 놀랍게도 농업회사법인이다. 제주농지대책특위에 따르면 이 사례 제보 농민들은 모두 일방적인 임차 계약 종료로 느닷없이 농사지을 땅을 잃은 사람들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한 낡은 상가 지하층이 소재지로 돼 있던 이 부동산은 농업회사법인의 자격을 이용해 2015년경 대정읍 상모리를 중심으로 많은 농지를 매입하고. 이를 수없이 쪼개 외지인들에게 되팔았다. 당시는 인근의 신도리가 제주 제2공항의 유력 후보지로 거론되던 시기다. 문제가 된 토지들의 등기부등본을 살펴보면 토지 구매자는 주로 경남권에 거주하는 외지인들이었다.

한 예로 그 면적이 본래 5,395㎡(약 1,600평)이었던 한 밭은 그해 6월 이 농업회사법인에 의해 430㎡ 안팎의 11필지로 쪼개졌다. 이 필지들은 불과 한두 달 뒤 소유주가 다시 외지인들로 바뀌었는데, 필지당 토지구매자 2~4명이 참여해 지분을 나눠 갖는 형태로 다시 한번 쪼개졌다. 불과 1,600평 크기 밭의 주인이 무려 서른 명에 이르는 셈이다. 가장 작게는 단 10평(33㎡)을 사간 사례도 있었는데, 이때 외지인들이 땅을 구매한 가격은 평당 116만원에 달했다.

해당 농지는 수도 없이 쪼개졌지만, 한 덩이 필지 모양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예나 지금이나 실경작자는 단 한 명이다. 수십 명에 달하는 땅 주인과 농민 단 한 사람 사이 임차 계약이 사실상 불가능하니, 관리를 명목으로 부동산이 대신 임대료를 받는 소위 ‘임대료 장사’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김창남 전국농민회총연맹 제주도연맹 정책위원장(서귀포시 안덕면)은 “제주도 기획부동산을 통해 주말체험 영농 명목으로 사 가는 쪼개기 농지의 경우 부동산이 토지주와 협의해 대신 임대료를 받는 사례가 대부분”이라며 “심지어는 부동산 측에서 협의도 하지 않고 임대료를 받다가 나중에 적발돼 토지주와 직접 계약을 하는 사례도 봤다”라고 말했다.

 

전농 제주도연맹 농지대책특별위원회 회원들이 지난 16일 저녁 성산읍농민회 사무실에서 농지 투기가 의심되는 지역의 등기부등본을 살펴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계약서 없는 임차농사, 그조차 지을 수 없으니

이 농지들 대부분은 서류상으로 농사짓는 사람이 없는 땅이 된다. ‘계약서 없는 계약’마저 부동산과 맺기 때문에 실경작자인 임차농은 물론이고, 수십 명에 달하는 땅 주인들 역시 서류를 꾸며서라도 자경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농업경영체 등록이 가능한 최소한의 농지면적인 1,000㎡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 실제 지주와 임차인의 관계가 거의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갑작스레 땅이 팔리거나, 부동산이 임차료를 올리면 농민들은 곧바로 경작권을 잃을 수 있다. 제주 농민들이 행동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이제 계약서 없고, 직불금 못 받는 임차 농사조차 지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농지들은 지적도만 봐도 농사지을 목적으로 거래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듯하게 잘라서는 도로와 접하지 않는 분할지가 생기는 경우 온갖 방법을 써서 도로와의 접점을 만드는 게 이런 농지들의 특징이다. 그래야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모습은 네모난 필지에 굴뚝처럼 땅을 잘라 붙여 도로와 연결한 모양새다. 이유가 있어 쪼갠다 한들 농사를 지을 목적이라면 수고를 들여가며 그릴 이유가 없는 경계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농지 쪼개기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제주 내에서 횡행해왔다. 투기 농지를 특정할 수 있는 표식이 충분한데도 관련한 전수조사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제주 농민들이 제주도 농지이용실태조사가 의미없는 탁상행정이라고 비판하는 까닭이자, 농사를 실제로 ‘누가’ 짓고 있는지 조사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이유다.

 

쪼개기가 의심되는 농지들의 전형적인 모습. 도로인접을 위해 ㄱ, ㄴ자 모양의 비정상적 필지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실제 경작은 쪼개기 전의 한덩어리째로 이뤄진다. 출처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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