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복을 지난 지금이 우리 지역에서는 제일 한가한 때인가 봅니다. 깨밭도 다 매고, 콩밭도 잡초가 못 자랄 만큼 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아직 고추는 익지 않아서 간간이 병해충 방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줄진 논바닥만 보일 정도로 벼가 자랐지만 항공방제를 하는 통에, 농약치고 약줄 잡으며 부부간에 싸우는 일도 이제 그 옛날 전설이 되고 말았네요.이럴 때면 마을회관이나 정자나무 아래, 또는 도량 좋아 마음의 가시가 없는 사람의 집으로 일없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때마침 무성하게 자란 호박잎 아래 탐스럽게 매달린 호박을 따서 넓은 대야
16개월 된 막내아들을 데리고 농협에 갔더니 “어머 축하드려요”, “쌍둥이라면서요” 농협직원이 뜬금없는 반색을 하며 축하한다. “엥~ 뭐가요. 제가요? 헉.” 화들짝 놀라, 질색을 하며 거부감을 드러냈다.“사시는 마을에 그 집 있잖아요. 쌍둥이라면서요?” “아 ㅇㅇㅇ 아저씨네, 정말이요, 잘됐다.” 그제서야 경계하던 마음은 어느새 반가움으로 바뀌어 더 소리 높여 맞장구를 치며 좋아했다. 휴, 다행히 이미 아이 넷이 있는 내 얘기는 아니었던 것이다.경사다. 우리 마을 어느 집에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이다. 더구나 아이를 보기 힘든
정금언니는 초등학교 조리사입니다. 쉬는 날엔 밀린 농사일로 눈코 뜰 새 없답니다. 남편 또한 건설일까지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니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이자 여성농민회 사무국장입니다. 창근씨는 톨게이트 수납원입니다. 고추장 담가 팔아야 할 창근씨 어머니는 고추끈도 묶지 못한 1,000주의 고추를 보며 한숨을 쉽니다.“어쩔 수 없어요. 그냥 올 고추농사 포기합시다.” 효자 창근씨는 톨게이트 노조 지부장입니다. 팔순이 다된 어머니는 놉을 얻어 고추끈을 맵니다. 아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기에 타박만 하고 있을 수 없었겠지요. 농
1994년부터 토종닭을 키우고 있다. 넓고 공기 좋은 산에 닭을 방사해 키우고 있다. 어느 날 축산물 가공처리법이 시행되면서 도계장에서 도계를 해야 한단다. 그래서 닭 200여 마리를 가지고 도계장에 갔다. 닭을 컨베이어벨트에 넣자마자 사방으로 닭이 날아올랐다. 컨베이어벨트는 우리집 닭에게는 러닝머신이었다. 도계장은 비상사태가 됐다. 닭들은 옆 공장까지 날아다녔고 직원들은 날아다니는 닭들을 잡으러 다녔다.다시 케이지에 넣어 직접 다리를 걸고 컨베이어벨트 위의 닭은 고리로 다리를 걸어 끌어냈다. 한 마리 걸고 20여개 뒤에 한 마리
팥 없는 살림은 되어도 콩 없는 살림은 안 된다 하고, 깨 없는 살림은 살아도 고춧가루 없이는 못 산다고 어른들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아마도 우리 식생활에서 콩이나 고춧가루의 비중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더라도 팥에 깨를 빗대는 것은 좀 과하다 싶습니다. 떡이나 죽 등의 특별식에 쓰이는 정도의 팥과 온갖 반찬에 다 들어가는 참기름과는 애당초 비교할 바가 못 되니까요.생각해보면 300여 가지가 넘는 나물을 먹는 우리민족의 지혜는 참기름과 깨소금의 공으로 돌려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 자라면 독초가 되는 풀도 어린 시절에는 나물로
여성농민으로 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땅냄새, 풀냄새, 벌레들의 분주한 움직임, 호미질과 함께 불쑥 튀어나오는 지렁이의 치열한 몸부림, 해뜨기 전 차분히 가라앉은 안개, 이른 아침 부지런히 날아오르는 산새소리, 호미로 흙 끌어내는 소리에 맞춘 숨 가픈 나의 호흡과 씨앗에서부터 힘껏 솟아오른 생명들을 마주할 때 모든 존재에 대해 감동하고 감사하게 된다.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더욱이 여성농민의 농사노동, 생산자로써의 소득은 형편없었다. 농사는 안정된 소득으로 이어지기 힘들었고 소규모로 지은 농산물은 공판장에 가지도 못했
오늘(6일)은 농사일이 절정기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망종(芒種)이다. 오죽했으면 부엌에서 불을 때던 부지깽이도 일을 거들며, 발등에 오줌을 싼다는 말이 망종과 더불어 흘러 내려오는 말이 되었을까?“그래도 지금은 양반이여.” 별일도 아니라는 말을 이리 표현하시는 어머님이 땀을 흘리며 내뱉는다. 온 동네 사람들이 공동모내기를 해야 했는데 지금은 이앙기 한 대가 하루에 동네 들판 10필지는 족히 심어 제끼니 대단하다 싶으신가 보다. 소와 쟁기로 논 갈고 밭 갈던 때와 어찌 견주겠나 싶긴 하지만 50마력의 트랙터가 논을 갈고 저수지에 수로
얼마 전에 극한직업이라는 영화를 봤다. 많이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의 직업 농촌의 아낙, 이보다 더한 극한 직업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1993년 귀농을 했을 때 다섯 살, 넉 달 된 두 아이가 있었다. 처음 일 년은 시골 가서 아이만 키우면 된다는 남편의 말처럼 나는 아이 둘을 키우는 일에만 집중했다.그러던 어느 날 토종닭을 키우던 남편은 방목으로 정성껏 키운 닭을 팔려고 했으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사겠다는 상인의 말에 화를 냈다. 상인은 사료값만 더 들어갈 텐데 하면서 자리를 떴고 남편은 상인에게 닭을 넘기지 말고 삶아
가두어 놓은 논물에 산그늘이 내려앉는 계절입니다. 이미 모를 심은 논에도, 또 아직 모심기를 준비하는 논에도 살랑살랑 이는 봄바람에 산 그림자가 일렁이면 내 마음도 물결 따라 일렁입니다. 초록빛 산 그림자를 바라보며 짧은 사색에 빠져보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골살이의 낭만이겠지요. 때 아닌 사치를 부리는 것도 잠시, 돌아서면 일이고 돌아서면 일입니다.결단코 늦은 것이 아니라고 마음을 달래는데도 이미 일을 마쳐가는 마을 분들과 비교할라치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나이 드신 분들의 축소된 농사 규모와 우리집 농사는 애당초 비교의
보이는 대로 있는 대로 씨앗을 들이고 모종을 심고 혹시나 하늘 한 번 쳐다보다 다시 물을 주고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겨우내 풀숲에 숨어 있었을까 진딧물은 어디에서 그리 많이 나왔을까? 무당벌레는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크기도 전에 다 빨아버리면 안되는데 싶어 손가락으로 쭈욱 개체수를 줄여본다. 이 일 저 일 호떡집에 불난 양 바쁘기 그지없다.지난 4월부터 언니네텃밭 생산자로 처음으로 농산물을 내기 시작했다. 신랑이 “빠끔살이 시작했네”란다. 그야말로 빠끔살이 농사를 시작한다.상추쌈을 먹다, 아욱국을 끓이다, 완두
몇 년 전 감자 가격 하락으로 팔지를 못해서 돼지를 먹인 적이 있다. 호박 가격이 떨어져서 퇴비장에 버린 적도 있었다. 팔지 못한 감자는 집에서 전분을 만들어서 팔았다. 전분을 만들면 저장기간이 길어지고 판매할 수 있는 기간도 길어진다. 신선한 감자로 만든 전분은 품질도 좋다.대부분의 농산물은 감자처럼 다량의 수분을 함유해서 저장성이 낮다. 감자는 여름에 주로 많이 생산된다. 각 지역마다 맛도 차이가 나고 날씨와 여건에 따라 크기와 모양도 달라진다. 이런 불규칙한 상황은 농산물의 수요와 공급에 많은 영향을 줘 가격 또한 변동이 심하
바깥말이라 불리는 우리 반은 열두 집 정도가 작은 골목 이쪽저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두, 세 집은 몇 년 전에 이사 왔고 나머지는 태어나거나 시집을 와 여태껏 살고 있으니 옆집 숟가락이 몇 개 정도인지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사이라 할 수 있습니다.저희 집을 중심으로 앞집, 양 옆집, 건넛집에 사시는 시어머니와 아주머님들 이렇게 다섯 분 정도가 가끔은 앞집에서, 왼쪽 옆집인 시댁에서 모이시기도 하셨지만 주로 오른쪽 옆집에서 웃고 떠들고 하셨습니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 잠이 깰 정도로 가까운 오른쪽 옆집. 겨우내 오른쪽 옆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