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 신자유주의 바리케이드를 넘어

  • 입력 2023.09.10 18:00
  • 수정 2023.09.10 19:14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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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2014년 3월 17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10차 협상이 일산 킨텍스에서 진행된 가운데 협상장 인근 일산문화공원에서 열린 ‘한-중 FTA 중단, 한-호주·캐나다 FTA 철회 전국농축산인결의대회’에서 한 농민이 ‘350만 농민의 목줄을 죄어오는’이라고 적힌 현수막 앞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다. 개방농정의 파고에 맞서 싸우며 9년 전 350만명이라 일컬었던 농민의 숫자는 2023년 현재 220만명 수준으로 대폭 감소했다. 한승호 기자
2014년 3월 17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10차 협상이 일산 킨텍스에서 진행된 가운데 협상장 인근 일산문화공원에서 열린 ‘한-중 FTA 중단, 한-호주·캐나다 FTA 철회 전국농축산인결의대회’에서 한 농민이 ‘350만 농민의 목줄을 죄어오는’이라고 적힌 현수막 앞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다. 개방농정의 파고에 맞서 싸우며 9년 전 350만명이라 일컬었던 농민의 숫자는 2023년 현재 220만명 수준으로 대폭 감소했다. 한승호 기자

멕시코 동남부 카리브해 연안의 휴양도시 칸쿤. 미국 부유층의 휴양지이자 제3세계 가난한 사람들은 발 디딜 엄두도 못 내던 그곳 칸쿤에, 2003년 9월 전 세계의 가난한 농민·노동자·원주민들이 모였다. 왜일까.

그해 9월 10~14일, 세계무역기구(WTO)는 칸쿤에서 제5차 각료회의를 열었다. WTO는 당시 각료회의를 통해 도하개발의제(DDA) 속 세부 의제들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진척시키려 했다. DDA는 2001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WTO 제4차 각료회의 결과 도출된 협정으로, 그 핵심 내용은 ‘관세·비관세 장벽을 허문 범세계적 단일 자유무역체제 구축’이었다. DDA 농업협정의 경우 △관세감축 비율 증가 △수출보조금 단계적 폐지 △국내 생산보조 실질적 감축 등의 내용이 담겨, 이게 현실화하면 국내 농민들은 치명타를 입을 상황이었다.

칸쿤 각료회의는 각국(정확히는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의 무역장벽 철폐 및 에너지·식량·물 등 필수 공공재의 상품화를 통해 초국적 자본의 활동 영역을 넓히려는 판이었다. 이에 세계 민중은 WTO 및 그 배후에 선 강대국들의 ‘신자유주의 질서 공고화’ 시도를 막고자, 모든 것을 걸고 칸쿤에 모였다. 그들 중엔 한국의 농민들이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전북 장수군에서 온 농민 이경해였다.

9월 10일(한국시간 9월 11일) 각료회의가 열리던 칸쿤 컨벤션센터 앞 ‘킬로미터 제로(KM 0)’엔 회의장을 ‘사수’하려는 멕시코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쳤다. 철망으로 된 바리케이드 뒤엔 총을 멘 경찰들이 서 있었다. 10일 ‘세계농민행동의 날’ 투쟁에 결합해 행진하던 세계 농민들이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대치하던 중, 농민 이경해는 바리케이드 위로 올라가 자결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WTO kills farmers!(WTO가 농민들을 죽인다!)”

그가 쾌유하길 바라던 세계 농민의 염원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농민들은 슬픔과 분노를 가슴에 품고 다음 싸움을 준비했다. 9월 13일 ‘세계민중행동의 날’ 투쟁에 참가한 1만여명의 반(反)세계화 물결은 각료회의장으로 향했다. 다시 맞닥뜨린 바리케이드 앞에서 세계 민중은 힘과 지혜를 모았다. 한국 투쟁단원들은 배의 닻으로 쓰는 굵은 동아줄을 가져와 철조망에 잽싸게 묶었다. 전 세계 수많은 민중이 그 동아줄을 함께 당겼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전기환 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정책위원장은 “동아줄을 걸긴 전농 회원들이 걸었는데 줄을 당기긴 남미에서 온 사람들이 제일 열심히 당기더라”고 회상했다. 이경해 농민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그날 현장에 있던 세계인들의 마음이었다. 이내 철옹성 같던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고, 투쟁 대오는 협상장으로 달려갔다. 끊임없는 투쟁 끝에, 각료회의는 아무런 협상도 성사시키지 못한 채 종료됐다. 이경해 농민의 죽음을 넘어, 세계 민중은 신자유주의 바리케이드를 넘어서는 승리를 거뒀다.

칸쿤투쟁 승리 그 후 20년. 우리는 농민의 삶을 옥죄어 온 신자유주의 체제의 붕괴 조짐을 코로나19 및 기후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통해 목도하고 있다. 국내에선 개방농정이 아닌 식량주권 강화 농정, 농민권리를 보장하는 농정이 요구되며, 세계적으로는 강대국과 초국적 자본의 영향력을 벗어난 ‘인권·식량주권 기반 대안무역체계’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반세계화 칸쿤 농민투쟁 승리 20주년을 맞이한 오늘, 농민들은 이러한 대안을 모색하며 무너져가는 신자유주의 바리케이드를 넘어 새 세상으로 달려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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