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은 ‘디지털 혁신’, 뒤로는 ‘회장 연임’ … 겉에도 속에도 농민은 없다

[‘농협중앙회장 연임제’ 연재기획②]
농업·농민에 관심 없는 농협중앙회장

  • 입력 2023.06.11 18:00
  • 수정 2023.06.12 06:38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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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4년 단임인 농협중앙회장에 연임을 허용하자는「농업협동조합법」개정안이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농해수위)를 통과해 법제사법위원회 심사를 앞두고 있다. 이 법안은 일사천리의 진행 상황과는 반대로, 현직 이성희 농협중앙회장을 위한 특혜 논란과 이를 둘러싼 각종 추문으로 이미 심각하게 얼룩져 있으며 그 내용 역시 모순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본지는 법안에 연루돼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주제별로 정리해 매주 순차적으로 연재한다.


농협중앙회장 연임 허용 법안이 이대로 국회를 통과할 경우 차기 농협중앙회장은 매우 높은 확률로 현직 이성희 회장이 된다. 앞서 살펴본 농협의 구조적 폐단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회가 보장해주는 ‘이성희 농협’ 8년은 과연 농민들에게 얼마나 희망적일까.

2020년부터 지금까지 이성희 농협 3년여를 관통하는 경영 슬로건은 ‘디지털 혁신’이다. 시대적 변화에 선도적으로 움직인다는 취지지만, 아직까지도 전면에 내세울 만한 성과가 없는 데다 농협의 정체성마저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농협중앙회는 ‘디지털 혁신’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아주 자잘한 것까지 적극적으로 사업을 홍보해왔다. 가장 빈도가 많은 건 영농관리·뱅킹 등 프로그램 개발이나 금융분야 IT기술 접목이다. 모두가 단편적인 성격을 띠며, 농민 입장에선 실효성이 크지 않고 금융소비자 입장에선 경쟁사들에 비해 특별할 게 없는 것들이다.

이성희 회장 취임 후 야심차게 출범한 농협 온라인농산물거래소 역시 농산물 도매유통에 조금의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 취급품목과 거래물량을 늘려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규모가 미미하고 이용자가 제한적이다. 도매유통 분야 한 원로 관계자는 “농협 온라인거래소는 망한 모델이다. 활성화가 안 되는 와중에 실적을 늘리려고 공판장과 자회사에 ‘할당’을 내리니, 현장에서 끙끙 앓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농업 생산 분야에서 ‘디지털 농협’의 관심사는 스마트농업이다. 지난해까지 스마트농업 인큐베이팅 시설인 지역농협의 ‘스마트농업지원센터’ 2개소와 보급형 스마트팜 32개소를 지원하고 스마트농기계 487대를 보급하는 등 관련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이 실적 자체가 증명하듯 스마트농업은 진입장벽이 높고 수혜자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유례없는 생산비 폭등으로 일반 시설농가들조차 경영난을 호소하는 현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더욱이 스마트농업은 필연적으로 기업들의 손길을 동반하는 만큼 ‘농업자본·지역자본 유출’, ‘기업 배불리기’ 부작용 우려가 따라붙고 있다. 실제로 농협중앙회는 농민이 아닌 애그테크 관련 기업들에 다양한 경로로 투자·지원을 행하고 있으며 지난해엔 이를 구체화해 53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 기업 하나당 수억 내지 수십억원씩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사고를 비약해보면, 농협의 지원을 받아 기술력을 키운 이 기업들이 대기업에 흡수돼 농민을 압박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윤석열정부의 ‘푸드테크’ 정책은 대기업의 참여를 제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 기술에 대한 투자가 아주 불필요한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우려와 한층 절박해진 농업 현장의 상황을 고려할 때 농협이 이 분야에 과도한 중량을 싣고 있다는 지적이다.

농협중앙회는 지난해 10월 28일 ‘범농협 애그테크 상생혁신펀드’를 출범했다. 530억원 규모의 이 펀드는 농업분야 디지털 혁신기업을 발굴·육성하기 위한 것이며 이날 2개 기업이 합계 25억원을 투자받았다. 농협중앙회 제공
농협중앙회는 지난해 10월 28일 ‘범농협 애그테크 상생혁신펀드’를 출범했다. 530억원 규모의 이 펀드는 농업분야 디지털 혁신기업을 발굴·육성하기 위한 것이며 이날 2개 기업이 합계 25억원을 투자받았다. 농협중앙회 제공

애당초 ‘디지털 혁신’이라는 구호는 농민들의 삶과 동떨어져 농협의 경영기조로 적절치 않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농민들에겐 당장 농산물 유통혁신이나 농협의 체질을 바꾸는 일이 중요한데, 그 유통혁신조차 디지털·온라인으로만 끌고가니 산지에 아무 효과가 없다. ‘디지털’이라는 말에 집중할수록 모든 게 단어로만 되풀이되고 실제 농민들에게 와닿는 사업은 소홀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조직이나 기업 경영에 있어 ‘슬로건’의 구속력은 생각보다 강하다. ‘농가소득 5,000만원 달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전임 김병원 농협중앙회장 시절엔 농협 조직 전체가 농가소득에 관여하는 요소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반면 이성희 회장의 ‘디지털 혁신’ 슬로건은 농업 문제에 대한 현실적 고민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농업인구가 가장 많은 영남·호남의 지역농협에서 중앙회 회장과 임직원을 대상으로 ‘소통 부재’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디지털 혁신’이라도 충실하게 추진했다면 다행이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회장 임기 4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농협 스스로 의미를 과시할 만한 굵직한 성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농가소득 5,000만원’처럼 임직원들을 구속하고 긴장케 하는 ‘힘’도 찾아볼 수 없다.

실질적으로 임직원들을 구속하고 있는 건 ‘회장 연임’이다. 최근 2년 동안 범 농협 조직이 투신하고 있는 최대 과업이 중앙회장 연임제 추진이라는 데는 농협 조직 밖에서도, 안에서도 이견이 없다. 회장 임기 동안 조직 전체가 농민이 아닌 회장의 보신을 위해 골몰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농협중앙회가 겉으로 보여주는 ‘디지털 혁신’에도, 실질적으로 몰두하는 ‘회장 연임’에도 ‘농민’이 없다는 것이다. 중앙회의 구호나 움직임뿐 아니라 이성희 회장의 행적을 살펴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정부 농업정책을 수행하는 농협중앙회는 늘 대체로 정부에 협조적이었지만, 이 회장은 농민들 숨통을 옥죄는 정부 정책에도 지나치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정부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추진이나 농산물가격 폭락에 무반응으로 일관했고, 기재부의 ‘소비자물가 잡기’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쌀값 폭락 국면에선 “지역농협들이 쌀을 너무 고가로 매입하면 안 된다”는 반농민적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협중앙회장에겐 전국의 회원조합 조합장들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연임이 허용만 된다면 재선이 유력하다.

농협개혁 세력들은 중앙회장 연임제의 선결 조건으로 중앙회장의 ‘조합원 직선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지금의 구조상 농협중앙회장이 농민조합원들의 뜻을 받들어 수행할 수 없으며 현직 이성희 회장이 그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역사상 가장 우수한 회장이 재임 중이었어도 논란이 거셌을 ‘현직 소급적용 연임제’지만, 이 회장의 지난 3년은 농민조합원들의 눈에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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