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업 ‘판갈이’ 기회, 놓치지 말자

  • 입력 2021.12.12 18:0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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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달 17일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이대로는 못살겠다! 적폐농정 갈아엎자! 전국농민총궐기'가 진행된 가운데 농민들이 ‘농민기본법 제정’, ‘공공농업으로 전환’ 등을 요구하며 굳은 표정으로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달 17일 서울 여의도 KDB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이대로는 못살겠다! 적폐농정 갈아엎자! 전국농민총궐기'가 진행된 가운데 농민들이 ‘농민기본법 제정’, ‘공공농업으로 전환’ 등을 요구하며 굳은 표정으로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정 틀 전환. 농민들 입장에서 정말 지겨울 정도로 들어온 표현이면서도, ‘제발 말만 떠벌리지 말고 실천하라’고 촉구하는 게 바로 이 ‘농정 틀 전환’이다. 당최 지금의 농정 틀에 무슨 문제가 있길래 지금까지 농정 틀 전환이란 말이 반복됐을까?

현재 한국 농정의 틀은 사실상 세 주체에 의해 만들어졌다. 첫 번째 주체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다. 일제는 조선에 ‘근대농업’을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1,500여종에 달했던 조선의 토종벼를 몰아낸 자리에 일본에서 육성한 신품종 벼를 이식했다.

이 벼는 화학비료를 사용해야만 잘 자랐다. 일제는 조선에서의 쌀 생산량 증대를 위해(실상은 그 쌀을 아시아 침략을 위한 군수물자로 수탈하기 위해)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현재의 북녘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에 아시아 최대 질소비료공장을 세웠다. 일제가 조선에 강제이식한 농업은 농민이 빚을 내서라도 비료 및 각종 농자재를 사지 않으면 유지가 불가능한 농업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근대농업’을 통해 생산량이 증대됐다고 예찬했지만, 정작 1942년 전체 쌀 생산량의 55.8%, 1943년 68%가 일제의 전쟁 수행목적으로 공출됐다. 농민들은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조선의 농지에 남은 건 과거엔 접하기 어려웠던 도열병 등의 온갖 병해충, 그리고 화학비료·농약 과다 사용으로 점차 병들어가는 땅뿐이었다. 실상 농민에겐 남은 게 없는 ‘수탈농정’이었다. ‘농사짓는 자 따로, 돈 버는 자 따로’가 핵심인 수탈농정의 본질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45년 해방 후 일제가 물러간 자리엔 미군정이 들어섰다. 미국은 현 농정 틀을 만든 두 번째 주체였다. 미국은 해방 후 20여년간 자국의 잉여농산물(특히 밀)을 ‘원조’ 명목으로 한반도 남측에 밀어넣어 우리 농업이 자생할 기반을 무너뜨리더니, 1980년대부턴 ‘신자유주의’라는 미명하에 우리나라의 농산물시장을 개방했다.

말이 좋아 개방이지, 사실상 미국산 농축산물 수입을 위해 우리 식량주권을 팔아넘긴 행위였다. 한국 현대농업사에서 정부가 미국에 ‘개방농정’을 펼친 대가로 농축산물을 대거 수입하고, 그로 인해 국내 농산물 가격이 폭락했던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1980~1985년 전두환이 병든 미국 소를 비롯한 20만7,000여마리의 외국 소를 수입해, 어미 소값이 송아지값에도 못 미치는 참사를 야기한 ‘소값 파동’이 대표적 사례다. 미국이 한국 농산물시장을 열어젖히자 온 사방 나라들이 우리나라 시장에 자국 농산물을 밀어넣고자 달려들었다.

일본, 미국 등 외세에 오랜 세월 시달린 농민들을 우리나라 정부라도 달래야 했다. 그러나 현재의 농정 틀 형성에 기여(?)한 세 번째 주체인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그야말로 ‘농민소외 농정’으로 일관했다. 저곡가 정책으로 인한 농가소득 저하 및 농민의 이농(離農) 증가, 농촌공동체 붕괴 등 악순환이 이어졌다. 농민들이 목숨 걸고 ‘개방농정 반대’를 외쳐도, 농정개혁을 외쳐도 대한민국 정부는 들은 체도 안 했다.

일제강점기의 유산인 ‘수탈농정’, 미국이 사실상 한국에 강제한 ‘개방농정’, 그리고 이 나라 정부가 대대로 이어가는 ‘농민소외 농정’. 이 세 가지로부터 형성된 게 바로 지금의 ‘농정 틀’이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로 인한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균열은, 과거의 농정 틀로는 더 이상 이 땅의 농업·농촌·농민이 지속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달리 보면 그 균열은 농민들에겐 기회다. 낡아빠진 옛 농정 틀을 판갈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판갈이의 시대, 농정 틀은 어떻게 바꿔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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