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가뭄에 이어 역대급 봄 가뭄이 계속되고 있는 지리산의 6월, 오랜 세월 유장하게 흐르던 지리산의 강들도 가뭄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한때 지리산 댐 건설 논란으로 하마터면 수장될 뻔했던 엄천강 용유담의 거북바위도 배를 수면 위로 드러낸 채 가뭄의 심각성을 눈으로 확인하게 한다. 산은 강을 건너지 않고 강은 산을 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지리산 골골 계곡물들은 북쪽 엄천강과 람천, 동쪽 경호강과 덕천강, 남쪽 섬진강을 지나 바다로, 바다로 향한다. 강물은 막힘 없이 흐르고 강가의 모래와 자갈 그리고 온갖 수생식물들이 어울릴 때
그해 6월,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휴전이 성립됐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지 열흘 만이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은 격랑에 휩싸였다. 조정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는 청일 양군의 조선 출병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곧바로 침략군, 점령군으로서의 본성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기 나라 백성을 학살케 한 치욕의 역사가 이로부터 비롯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조정은 당황했다. 농민군 또한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조정이 받아들인다면 해산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초토사 홍계훈이 이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자유’를 무려 35번 언급한 반면 ‘통합’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화제가 됐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통합’은 너무 당연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불평등은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 윤 대통령은 자유는 보편적 가치라고 강조했다. 평등은 보편적 가치가 아닌가.윤 대통령은 당연한 보편적 가치인 자유를 왜 이처럼 강조한 것일까. 그는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기초, 그리고 공정한 교육과 문화의 접근기회가 보장돼야 한다”, “이런 것 없이 자유
인디언들이 ‘오래전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이라 부르는 5월, 지리산 자락의 들녘은 무척 바쁜 달이다. 논에 물을 대고 모판을 준비하고 모내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달리 심했던 겨울 가뭄에 이어 계속되는 봄 가뭄에 절대적으로 물이 부족하지만 어렵게 어렵게 논에 물을 채우고 모내기는 시작되었다.지리산 자락의 논들, 특히 다랑논에 모가 심어지는 걸 보면서 식량에, 경관에, 저수지에, 산소공장 역할까지 이 엄중한 기후위기의 시대에 논은 확실한 멀티플레이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논 위의 농부들은 아티스트임이 분명하다.그런 의미에
돌아보면 우리 역사의 어느 한순간 격렬하거나 숭고하지 않은 때가 없다. 격랑의 근현대사에서 5월은 특히 그러하다. 80년 5월 광주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이고도 전투적인 투쟁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세월을 좀 더 거슬러 동학농민혁명의 연대기를 들여다보자.1만여 농민군이 집결한 백산대회, 황토현 전투와 황룡강 전투, 전주성 점령에 이르는 승리와 환희의 순간들 모두가 5월 한 달 동안에 있은 일이다.2018년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정했다. 이날은 농민군의 빛나는 첫 승리인 황토현 전승일이
윤석열 당선자가 곧 대통령에 취임한다. ‘촛불’은 꺼지고, 이제부터 윤석열의 시간이다. 그런데 국민 지지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새 정부가 출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과연 윤석열정부의 농정은 제대로 전개될 것인가. 그의 농정 공약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약속한 것만이라도 잘 지킨다면 좋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역대 정부의 대선 농정 공약(公約)이 빈 약속(空約)으로 끝나는 것을 늘 봐왔기 때문이다.윤석열 당선자는 대선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공약했다. ‘튼튼한 농업, 활기찬 농촌, 잘사는 농민
지리산 둘레길이 이어주는 남원-함양-산청-하동-구례 5개 시·군에 장수군까지 아우르는 ‘지리산권 특별지방자치단체’ 설치 추진을 위한 지리산권 지방의회 의장단 간담회가 지난 3월 전북 남원에서 열렸다. 하지만 지리산권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오래전부터 지역적 경계를 허물자는 ‘지리산공동체’를 꿈꾸며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그 지리산공동체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지리산 자락의 오일장이다.장 보따리를 바리바리 챙겨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지리산 골골 사람들이 모이는 오일장 중에 필자는 산청장(1/6), 단성장(0/5), 인월장(3/8)
고부를 빠져나간 전봉준은 불과 일주일 만에 다시 고부로 출병했다. 고부 봉기의 해산과 농민군의 출현은 사실상 동시에 진행됐다. 치밀한 사전 준비와 조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3월 20일(음력)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고부를 접수하고 백산에 집결하여 격문과 4대 명의를 만방에 띄워 혁명의 성격과 임무, 대상과 주체를 분명히 하고 기율을 엄정히 했다. 그들은 이제 명실상부한 동학농민혁명군, 그 수가 1만명에 달했다. 당시 농민군의 서슬 퍼런 기상이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로 오늘에 전승되고 있다.“서면 백산, 앉으면
1~2월 겨울철 정비 기간을 마친 지리산 둘레길이 3월부터 본격적인 길동무들의 발걸음으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21개 구간 총연장 295Km의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권 5개 시·군인 구례-함양-산청-하동-남원을 잇는 걷는 길로 고개를 넘어 마을과 마을을 지나고 곧장 오르지 않고 에둘러 가는 길로 들녘을 따라 삶과 노동을 만나고 마침내 자기를 만나 위안을 얻는 생명과 평화의 길이다.그리고 2019년엔 세계 최장의 야생화길로 인증을 받아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필자는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프로그램인 ‘숲샘과 함께 걷는 지리
새벽길 헤쳐가는 사람들 있어 역사는 전진한다. 여기 새벽길 홀로 걷는 이 있으니 그 이름 전봉준, 녹두장군 되시겠다. 얼마나 많은 필사의 노력이 겹겹이 쌓여 그는 혁명의 지도자로 그 이름 역사에 남기게 되었을까?역사는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난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던 고부 농민들과 일평생 혁명을 준비해 온 전봉준의 만남이 고부 농민봉기를 여느 고을의 민란, 농민봉기와 다르게 했다.죽창을 들건 장두가 되건 피차 목숨을 거는 일,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 없을 터 일개 고을의 난리와 고을을 벗어난 반란은 차원이 달랐다. 생존을 위해 죽창
지리산의 골골 물들이 엄천강, 경호강, 덕천강을 지나 남강이 되고 그 강물들이 모이는 진양호, 그 진양호에서 봄의 기운을 머금은 푸른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다. 동쪽 끝 웅석봉에서부터 서쪽 노고단까지의 그 장쾌한 능선이 진양호 푸른 물빛과 깔맞춤했다. 우수 즈음, 지리산에서 만난 봄의 전령사들을 소개한다.섣달에 핀다는 납매섣달 ‘납(臘)’에 매화 ‘매(梅)’ 납매를 성철스님 생가가 있는 산청 겁외사 근처 묵곡생태숲에서 만났다. 납매는 장미과인 매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꽃받침과로 노란 꽃과 은은한 향기가 겨울에 찾아온 손님 같다고 해
역사학자 고 이이화 선생은 조선 후기 마지막 100년을 ‘민란의 시대’라 명명했다. 1811년 홍경래의 관서농민전쟁으로 서막을 열고 1862년 임술 농민봉기를 거쳐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타올랐으니 민중사적 견지에서 들여다본 조선의 19세기는 온통 민중들의 변혁 열망으로 들끓었던 셈이다.1800년 정조 사후 그가 추진하던 개혁이 중단되고 극심한 세도 정치가 발호했다. 몇몇 세도가와 문벌이 조선의 모든 부와 권력을 거머쥐었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완고하게 뿌리를 내리며 나라를 좀먹고 거덜냈다. 백성들의 처지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