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서울에서 가장 먼 곳 중 한 곳인지라 한다하는 명사들을 초청해서 좋은 강연을 들을 기회가 드뭅니다. 또 먹고사는 것 외의 문제에 한갓지게 강연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보통의 정서는 아닙니다.도시에서야 더러 음악과 미술을 먹고 역사와 문화를 마시며 하세월을 보내는 한량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바다를 낀 이곳에서는 일하지 않고 세월을 보내는 것을 가장 ‘부도덕'으로 간주하는 통에 너나없이 노동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것이 옳은 삶의 방편이기는 하나 한편으로 나와 우리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어렵다
추수를 해야 하는 가을날 노오란 파도를 만들어내야 하는 벼들이 연이은 태풍에 쓰러졌다. 달라붙듯이 땅에 납작하게 누워버린 논도 있고 이리저리 뒤엉킨 논도 있고, 와중에도 말쑥하게 꼿꼿함을 유지하고 시원스럽게 흔들리는 논도 있다.곡물 통을 실은 트럭을 농로에 세워두고 타작하는 풍경을 지켜보자니, ‘또 걸리나’하는 불안과 걱정이 반복된다. 논에 납작하게 누워버린 벼줄기는 든든한 콤바인도 멈추게 한다. 농사지은 논 주인의 미안하고 애타는 표정과 타작해주는 남편의 답답한 표정이 각자의 허공으로 비껴서고 두 사람의 손은 뒤엉킨 지푸라기를 잡
옆 동네 여수에 있는 남해화학은 농협의 자회사이다. 농민들이 사용하는 비료의 50%이상을 생산하는 곳이라고 한다. 바로 그곳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60명을 10월 1일자로 일방적 해고통보를 했다. 비료가격을 낮게 책정해 농민들에게 공급하기 위해서일까?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섞인 비료로 하는 농사가 참도 잘되것다 싶다. 금동댁 손자가 해고를 당했다. 큰 회사에 취직했다며 자랑하던 손주였다.온 가족이 작은 땅덩어리에 매달려 농사를 짓다 보니 그녀의 논밭은 정갈하기만 하다. 밥티를 주어먹을 정도라는 말을 할 정도다. 아들 손자 잘되기만을 바
명절의 부산함과 가을의 풍요가 지나간 뒤에 또다시 바빠지는 계절, 가을이다. 계절의 변화는 비를 앞세우고 온다고 한다. 계절의 변화가 자연과 자연의 충돌을 통해 이루어지듯 인간의 변화는 어떤 충돌을 통해 이루어질까?추석 명절을 앞두고 모인 작은 모임에서 넌지시 농담처럼 “추석 때 우리 여자들이 모여서 즐거운 시간도 갖고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해 버렸다. 지친 사람들이 모여 피로를 풀면서 잔잔하고 소소한 일상을 나눌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이지 아니한가!추석 명절 내내 음식과 사람을 돌봐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에서 잠깐
마늘값이 한참 폭락하던 지난 여름, 거창지역의 여성농민들 앞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농민수당 이야기를 하다가 인생이 운빨 아니냐고 했습니다. 가령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는 내 남편뿐인데 하필 원예작물도 과수농사도 아닌 좁은 농지에서 노동강도는 최고로 세고 부가가치는 참으로 낮은 마늘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그러면서 밤낮 기온차가 많이 나서 명품사과를 생산하는 당신들은 남해 농민들보다는 훨씬 운빨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그 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며 웃었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운빨에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지역 간이나 산업
추석을 앞두고 몇 주간 계속된 비와 흐린 날씨. 땅과 하늘에 기대어 살아가는 농민에게는 추석의 풍요로움 보다 명절이 지나도 괴로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추석이 빠르나 느리나, 추석 전에 비가 많이 오거나 안 오거나. 농민에게 안전장치가 있어 속상해도 근심까지는 되지 않는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고 보름달에 기원해본다.그래도 추석은 즐거워야 하는 명절,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처음으로 나를 생각하는 추석에 도전했다. 365일 중 이틀씩 두 번의 큰 명절과 제사는 외며느리인 나에게는, 아이가 4명씩이나 되는 나에게는 과로를 동반한
‘도대체 이놈의 비는 언제까지 내린다냐? 아무 씨잘떼기 없는 비가 하루 왼 종일 추적추적 내리기만 하고 있으니.’베어놓은 참깨는 못 볼꼴을 보이고 있다. 가만히 서서 싹을 틔우고 각양각색의 곰팡이란 놈이 하나둘 피기 시작한다. 농사 시작하고 처음으로 재배한 참깨인데, 쉬워 보였는데, 작기도 길지 않게 보였는데….하지만 참깨라는 놈은 완전 내 생각을 간파하고 있는 듯 ‘그래 너 한번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을까? ‘울고 싶어라’ 노래가 절로 터져 나온다.참깨를 베어내고 무 씨앗을 넣을 때만 해도 ‘아싸 하늘이 내 일을 하나 덜어주는군’
열심히 농사를 짓는 이웃이 있다. 젊어서 두 부부는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이제는 나이가 여든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농지를 정리하시고 계신다.20년 전에 남편이 열심히 사는 부인을 위해서 밭 하나를 아내 이름으로 등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마음속 깊이 내 땅이 있다는 것에 스스로의 자존감도 높아지고 열심히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그런데 얼마 전에 몸이 아파서 병원비를 한다고 땅을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양도소득세 감면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이 농사를 지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농지원부랑 농가경영등록체에 등재돼 있
어느덧 여름이 끝나갑니다. 이제 여름나기는 더위와의 전쟁을 치르는 듯 힘겨운 살이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여기 남녘은 가뭄까지 겹쳐서 밭작물들이 맥없이 늘어져 있다가, 이 여름이 끝날 이 즈음에서야 열 오른 대지를 식혀주고 메마른 땅을 적셔주는 단비가 내립니다.그 더운 날들을 무얼 하고 지냈을까? 하고 돌아보니 지난 여름에는 유독 행사가 많았습니다. 마늘값 폭락으로 각종 회의나 간담회를 진행했고 힘을 행사하는 농민대회도 있었습니다. 또 단합대회 행사도 많았습니다. 해마다 하는 행사이지만 올해는 남편과 같이 안팎으로 집행책임자를 맡다
웽~웽~치지찍, 숨 가쁜 기계음이 새벽의 산과 들을 깨운다. “와~ 또 풀치시는구나.” 우리집 뒤 논주인 아저씨는 주말이면 논두렁의 풀을 치신다. 축구장 잔디처럼 까까머리가 된 논두렁은 보기도 좋고, 깔끔하기도 하다.자주 풀을 치는 아저씨는 부지런하시기도 하지만 사실상 논농사가 얼마 되지 않아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우리집 주변 풀은 숲처럼 우거지는 요즘이다.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풀이 참 많이 컸네” 말하면 “에휴” 남편의 한숨이 이어진다.남편의 여름은 그야말로 풀과의 전쟁이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사과밭,
남편 고향친구들 모임이 있습니다. ‘붕우회’ 누가 들어도 어떤 모임인지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모임이라며 맨날 놀림을 받습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농공단지 노동자로, 포크레인 기사로, 농기계대리점 사장으로 각자의 하는 일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간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맺어진 친구들입니다.초등학교 동창끼리, 서울 사는 처녀가 이모의 중매로, 가지각색의 인연으로 맺어진 친구들의 모임은 자연스럽게 가족들의 모임으로 이어졌습니다. 두 명의 친구는 첫 세대 국제결혼을 했습니다. 덕분에 두 명의
외출을 준비한다. 옷장을 열어 보지만 내게 어울리는 옷을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검게 그을린 얼굴 그리고 자주 옷 구입을 하지 않는 나는 그냥 최근에 선물 받은 옷을 입고 외출을 준비한다.거울로 얼굴을 보니 저번에 봤을 때 보다 훨씬 많이 탔다. 그래도 올해는 딸아이가 피부암을 걱정하면서 사준 선크림을 나름대로 열심히 발랐지만 바쁜 시간 속에서 잊어 먹고 안 바르기 일쑤였다. 그 사이 얼굴은 검게 탔고 팔과 다리도 검게 그을려 있다.얼마 전 그동안 묶었던 머리를 짧게 잘랐다. 나이가 들어서 머리를 묶으니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빠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