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도로를 따라 서울 여의도 근처를 지나본 사람이면 마포대교와 서강대교 사이에, 마치 두 개의 밤알 모양을 한 채 수풀로 덮여 있는 조그만 섬을 곁눈질로나마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심 속 새들의 천국이라 일컬어지는 밤섬이다.서울시에 의해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이 밤섬에는 천연기념물 황조롱이와 쇠부엉이를 비롯한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들고 붕어, 뱀장어, 쏘가리 등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서 도심 속의 생태공원으로 시민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그런데 바로 이 밤섬이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440여 명이
편지가 왔다.고국의 가족으로부터 두 달 남짓 동안이나 소식이 끊겨서 어깨가 바닥까지 처져 지내던 사우디의 건설 노동자 박기출 씨에게, 드디어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 그에게 고민 상담을 해주었던 공사현장의 김 주임도, 박 씨에게 편지를 전하면서 덩달아 기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런데 김 주임이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박 씨는 거의 혼이 나가 있었다.-기출씨, 왜 이래? 참, 아까 고향에서 편지 왔었잖아. 부인한테서 온 것 아녔어?-이 편지…마누라가 아니라…동네 사시는 당숙님께서…그런데 우리 집사람이…박기출 씨는 울음을 삼키느라 말을 잇
사우디아라비아 중부에 있는 ‘카미스’의 장교숙소 건설 현장. 누군가는 수평계로 수평을 잡고, 목수들은 콘크리트 타설을 위한 거푸집을 짜고, 다른 한쪽에서는 철근작업을 하는 등 건축물의 기초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갑자기 현장 소장이 메가폰을 켜더니 다급하게 소리친다.-모든 인부들은 작업을 중지하고 신속하게 버스에 올라타라! 지금 서쪽에서 모래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빨리 움직여!국내에서 민방공 훈련할 때에는 세월아 네월아 꾸무적대던 사람들이, 현장 소장의 입에서 ‘모래 폭풍’ 한 마디가 떨어지자, 불난 강변에 덴
작업이 없는 일요일이다. 인부들이 모처럼 외출복으로 갈아입고서 삼삼오오 무리지어, 현장에서 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시장으로 쇼핑을 나간다.모든 급여는 기본적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의 통장으로 입금되기 때문에, 담배를 비롯하여 기초적인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려면 가불을 해야 했다. 한 달 동안 일한 실적에 따라서 개인별로 지급받는 급여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가불을 할 수 있는 금액도 개인차가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500리얄(한화로 약 10만원)을 넘을 수는 없었다.쇼핑을 마치고 돌아온 인부들이 숙소에 풀어놓은 꾸러미들이 볼 만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중부 ‘카미스’ 지역에 대규모 군대막사를 건설하는 한국 건설업체의 공사현장.군 시설물 중 장교 숙소(BOQ)로 쓰일 건물이 완공단계에 접어들어서, 마지막 페인트 작업을 남겨두고 있다. 마침 그 공기(工期)에 맞춰 한국에서 날아간 도장공들이 아침, 작업출동을 준비하고 있다. 담당주임이 작업지시를 내린다.-제1조가 다섯 명이지요? 비오큐 A동부터 작업 들어갑니다. A동은 200시간이 할당됐으니까, 자재창고에 가서 페인트 수령한 다음에 곧바로 현장 출동하세요.비오큐 한 동을 페인트칠하는 데에 200시간이 할당되었다는 말은
1980년 여름, 한진건설의 하청업체 직원인 김윤억 씨가 한국에서 선발한 30여 명의 건설노동자들(페인트공)을 인솔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공항에 도착했다.사우디에 첫발을 내디딘 한국인들은 너나없이, 우선 맹렬한 기세로 정수리에 내리꽂히다시피 한, 송곳 같은 햇볕에 기가 꺾였다. 여름철의 평균 최고기온이 40도를 훌쩍 넘었다.하지만 그 지역은 습도가 낮기 때문에, 제아무리 불볕더위가 내리쬐는 날에도 그늘에만 들어갔다 하면 거짓말같이 시원하더라는 게 공통적인 체험담이다.노동자들을 태운 버스가 리야드 공항에서 두 시간 가량을 달린
중동 현장에 파견할 건설 노동자들은 실기 시험 과정에서 확인된 실력에 따라서 이른바 ‘식읍’이라는 것을 부여받았다. 왕년에 사우디 현장에서 도장공으로 일했던 김윤억 씨로부터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시간 단위로 계산한 노임, 즉 시급(時給)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식읍(食邑)이라 했다. 전통시대에 왕족이나 공신들에게 일정 지역의 조세를 받아쓰게 했던 그 ‘식읍’이라는 말을 누가 거기에다 끌어다 쓸 발상을 했는지 좀 흥미롭다.말하자면 식읍은 노동자 개개인이 지닌 해당분야의 기능을 수준별로 나눠 매긴 등급이다. 같은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대대적인 중동 건설 붐이 일면서 노동자들이 대거 사우디 등의 현장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가고 싶다고 누구나 무차별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별다른 기술이 없어서 잡역부로 신청해서 가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정부분 기술을 습득한 기능공하고는 급여의 차이가 컸다.가령 주택건설 현장만 해도 타일, 도장(페인트), 미장, 조적(組積, 벽돌 쌓기), 배관, 철근, 목공…등 다양한 분야의 기능을 갖춘 인력이 필요했고 또한 기업체마다 현장 사정에 따라서, 혹은 시기별로 분야별 선발인원이 정해져 있었기 때
-자, 여기 있는 사우디 지도를 잘 보세요. 이쪽에 표시된 이 지역이 나푸드 사막인데 면적이 5만7,000평방킬로미터예요. 오른편에 있는 이 지역은 다나 사막이고, 남쪽에 있는 이곳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룹알할리 사막입니다. 그 면적이 한반도의 세 배나 되는 65만 평방킬로미터예요. 이 거대한 사막에서 모래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집니다. 돌풍에 모래만 날리는 게 아니에요. 돌멩이까지 섞여서 몰아친다니까요. 이런 경우 재빨리 현장 건물 안으로 대피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나요. 게다가 예고 없이 후끈후끈한 열풍이
아부지가 윗녘 나들이를 해야 하는 날이면 엄니는 새벽부터 바빴다. 우선 아부지가 입고 나갈 두루마기며 저고리며 한복바지를 내어다 마당의 빨랫줄에 걸었다. 그러고는 아궁이에서 숯불을 피워 다리미에 담았다.이윽고 엄니는 촉촉하게 이슬을 맞은 두루마기 등속을 걷어 마루로 가지고 와서는, 아직 단잠에 빠져있는 나를 불러 깨웠다. 맏이였으니까.“얼릉 일어나라. 느그 아부지 옷 좀 같이 대리자!”툴툴거리며 이불속을 빠져나온 나는 마루로 나와서 다리미를 든 엄니와 마주 앉았다. 두 손으로 두루마기 자락을 팽팽하게 당겨 잡아야 했다. 엄니는 왼손
1950년대 중반에 민영 텔레비전 방송국이 생겼다가 이후 수지를 맞추지 못해 문을 닫았고, 1957년 9월에는 주한미군방송(AFKN)이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가 열린 것은 1961년 12월 31일에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인 KBS TV가 탄생하면서부터다.집집마다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종(種)의 상전이 쳐들어와서 안방을 점령했으니(물론 초기에는 형편이 여유로운 집에서만 장만할 수 있었던 사치품이었지만), 당연히 새로 등장한 그 안주인의 질병을 치료해 줄 의사도 필요했다. 텔레비전을 가설하고
남해안 섬마을의 가난한 우리 집에도 라디오가 생겼다. 그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어느 해 꽃피던 봄날, 경주 이 씨 문중의 족보 정리 일을 하러 육지에 출장 나갔던 아부지가 그 신기한 물건을 사갖고 돌아오셨다. 1960년대 초반으로 어림한다. 적어도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63년 말 이후의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해 10월 15일에 제5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우리 집에 라디오가 없었으므로, 아부지는 만식이네 집에 가서 밤을 새워가며 개표방송을 듣고는, 풀죽은 모습을 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아부지가 말했다.-져부렀다. 윤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