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중동 바람③ ‘공항의 이별’

  • 입력 2020.03.0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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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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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현장에 파견할 건설 노동자들은 실기 시험 과정에서 확인된 실력에 따라서 이른바 ‘식읍’이라는 것을 부여받았다. 왕년에 사우디 현장에서 도장공으로 일했던 김윤억 씨로부터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시간 단위로 계산한 노임, 즉 시급(時給)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식읍(食邑)이라 했다. 전통시대에 왕족이나 공신들에게 일정 지역의 조세를 받아쓰게 했던 그 ‘식읍’이라는 말을 누가 거기에다 끌어다 쓸 발상을 했는지 좀 흥미롭다.

말하자면 식읍은 노동자 개개인이 지닌 해당분야의 기능을 수준별로 나눠 매긴 등급이다. 같은 도장공(페인트공)이라 해도 하루 일당을 45불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60불 받는 사람이 있었다. 식읍이 달랐던 것이다. 그런 내막을 알 리 없는 부인들은 남편을 사우디에 보낸 이웃 간에, 월급통장을 비교해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우리 용남이 아빠나 철수 아빠나 똑같은 철근 조립공으로 사우디에 갔는데, 어째서 우리 애 아빠 월급이 매번 통장에 더 적게 찍혀 나오느냐 이 말이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용남이 아빠는 얼굴이 원체 귄 있게 생겨서 그 뭣이냐, 허연 차도르 쓴 사우디 여자랑 작은 살림이래도 채린 모냥이제.

-뭐야, 이놈의 여편네가!

하지만 위의 사례도 어디까지나 특정한 기술을 가진 기능공들의 얘기고, 아무런 기술이 없는 ‘잡역부’의 급여는 한참 더 낮았다. 그래도 국내의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으로 뛰는 것보다는 노임이 두 배, 혹은 세 배 가량이나 높았기 때문에 그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앞에 있는 회포대를 둘러메고 저기 깃발 꽂혀 있는 데까지 달려갔다 오는 겁니다. 시이작!

잡역부의 선발시험은 이런 식이었다. 무거운 물건을 양손에 들고 뛰게 하거나, 모래주머니나 시멘트 포대를 메고 달리게 함으로써 신체에 이상이 없는지 정도를 시험했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1980년에 한진건설의 협력업체 직원으로, 선발된 도장공들을 이끌고 사우디로 건너갔던 김윤억 씨의 행적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건설업체 기능공들이 중동으로 떠날 때면, 김포공항 국제선 출국장에서는 한바탕 울음판이 벌어지곤 했다.

“그 때 내가 우리 회사에서 선발한 노동자 30여 명을 인솔해가지고 사우디로 출발하는데, 공항 출국장이 꼭 무슨 전쟁터에 징용 가는 가족하고 생이별을 하는 현장 같았어요.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는 아들을 부여안고 울고, 어린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울고…. 노동자 한 사람당 줄잡아 열 명 이상의 인원이 몰려나와서 한바탕 ‘이별잔치’를 벌이는 거지요.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하청회사 직원으로서 노동자들을 인솔했던 나도 중동행이 처음이라 눈물이 나서, 식구들에게 둘러싸여서 대성통곡을 했다니까요. 비행기라는 걸 처음 타보는 것이니까 두렵기도 했고….”

김윤억 씨의 회고다.

그렇게 그들은 난생 처음 비행기에 몸을 싣고는 두려움 반, 설렘 반의 가슴으로 열사의 땅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드디어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트랩을 내린 노동자들의 일성은 이러했다.

“와, 지독하게 뜨겁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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