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파사④ 섬마을 소년의 ‘라디오 시대’

  • 입력 2020.01.1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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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남해안 섬마을의 가난한 우리 집에도 라디오가 생겼다. 그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어느 해 꽃피던 봄날, 경주 이 씨 문중의 족보 정리 일을 하러 육지에 출장 나갔던 아부지가 그 신기한 물건을 사갖고 돌아오셨다. 1960년대 초반으로 어림한다. 적어도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63년 말 이후의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해 10월 15일에 제5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우리 집에 라디오가 없었으므로, 아부지는 만식이네 집에 가서 밤을 새워가며 개표방송을 듣고는, 풀죽은 모습을 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아부지가 말했다.

-져부렀다. 윤보선이가 박정희한테….

나는 생각했다. 그게 다 라디오 때문이라고. 라디오만 없었으면 윤 아무개가 박 아무개한테 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부지도 그렇게 매가리 없이 낙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보다 다섯 살이 위인 누나는 박재란의 ‘창살 없는 감옥’이며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따위의 유행가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마다 아예 백로지에 가사를 적어가며 흥얼거렸다. 라디오 보급 덕분에 대중가요는 그 작은 섬마을 ‘대중’에게도 널리 유행을 탔고, 이전에는 없던 ‘가요 콩쿠르’라는 잔치판이 생겨났다. 마을에서 한 가락씩 한다는 자칭 ‘명카수’들이 마이크 앞에 나서서 노래 실력을 겨뤘다. 몇몇은 양은 주전자나, 빨랫비누나, 통성냥이나, 혹은 쇠스랑 등속을 상으로 타갔다. 섬사람들은 그 잔치를 그냥 ‘콩쿨대회’라 불렀다.

내 고향 섬마을은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해 있었으나, 광주방송국의 전파는 마을 뒷산을 타넘지 못 했으므로 라디오에 잡히지 않았다. 대신에 바다를 내달려온 제주방송이 쩌렁쩌렁 잘도 들렸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면 제주방송국도 잠을 잤다. 하지만 아부지는 집요하게 사이클을 더듬어 돌려서 결국 한 귀퉁이에서 소리를 잡아내곤 하였다. 바다건너 일본방송이었다. 총각 시절에 일본에 건너가 한 동안 나고야에 거주했으므로 아부지는 일본 방송을 알아들었다.

가끔은 귀에 선 목소리가 심야에 흘러나왔다. 북한방송이었다. 그것이 북한방송이라고 아부지가 말해주었다. 그리고 돈스 돈돈, 돈스 돈돈…모스부호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북한에서 남쪽에 있는 간첩에게 보내는 암호라고 했다. 그것도 아부지가 알려 주었다.

마을 회관의 벽면이나 학교의 간첩신고 게시판에 적혀있는「이러한 사람은 신고합시다」에는 ‘숨어서 몰래 북한방송을 듣는 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잠깐 의심했으나 곰곰 생각해보니 아부지는 간첩은 아닌 것 같았다. 왜냐면 북한 방송을 ‘숨어서 몰래’ 듣는 게 아니라, 밤이 늦어 더는 들을 방송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듣는 것이었으므로.

아부지가 건전지를 새로 사다 갈아 끼웠다. 나는 아부지가 버린 건전지 둘을 갖고 종석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종석이의 형 종만이가 두 건전지의 음극과 양극을 맞추고는 한 쪽에 혀를 갖다 댔다.

-쎗바닥이 찌릿찌릿 해야 하는디, 암시랑토 안 한 걸 봉께 약이 다 떨어져부렀다야.

우리는 못 쓰게 된 건전지 두 개를 가지고 나와 각각 한 개씩 바위에 올려놓고는 돌멩이를 집어서 마구 두들겨 팼다. 한참 만에 속에서 검은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우리는 건전지의 심지를, 검은 탄소막대 하나씩을 추출해 냈다. 검댕 묻은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가자!

우리는 낙서를 할 만한 반반한 곳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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