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중동 바람⑥ 배달의 자손 - 사막에서 술 빚는 법

  • 입력 2020.03.22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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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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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이 없는 일요일이다. 인부들이 모처럼 외출복으로 갈아입고서 삼삼오오 무리지어, 현장에서 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시장으로 쇼핑을 나간다.

모든 급여는 기본적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의 통장으로 입금되기 때문에, 담배를 비롯하여 기초적인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려면 가불을 해야 했다. 한 달 동안 일한 실적에 따라서 개인별로 지급받는 급여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가불을 할 수 있는 금액도 개인차가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500리얄(한화로 약 10만원)을 넘을 수는 없었다.

쇼핑을 마치고 돌아온 인부들이 숙소에 풀어놓은 꾸러미들이 볼 만하다.

-자넨 뭘 그렇게 여러 가지를 샀어?

-딸내미 신발하고, 일제 카세트 라디오 하나 샀네. 이거 한국 가져가면 값을 두 배로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청소기도 하나 샀고.

-아이고, 셋방살이 하는 처지에 기계 돌려서 청소할 바닥이 어디 있다고. 난 마누라한테 주려고 향수를 한 병 샀어. 사진 봤지? 우리 마누라 꾸며놓으면 문희, 윤정희 저리 가라야.

-그래 봤자 시골서 농사짓는다면서 향수는 무슨…. 그러다 바람 나, 이 사람아.

-재수 없는 소리 하고 있어.

어찌어찌 하다 보니 ‘마누라-바람’같은 그 바닥의 금기어를 건드리고 말았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며 숙소의 문이 열린다.

-저 쪽 자재창고 옆 그늘에서 양고기 굽고 있으니까 다들 나오랍니다!

양고기 잔치가 벌어졌다. 가장 흔한 먹을거리가 양고기였다. 적당히 배가 불러오자 누군가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달려라 고향열차…’ 하지만 흥이 오를 리 없다. 한 가지가 빠졌기 때문이다. 고참 일꾼이 때맞춰 양철통 하나를 들고 등장한다.

-현장 감독관 순찰 나오나 잘들 살펴봐. 내가 오늘 막걸리 파티를 시켜 줄 테니까.

환호성이 터진다. 음주가 엄격히 금지된 회교국가인지라 술을 사왔을 리는 없다.

“막걸리 빚는 거 쉬워요. 양철통에다 파인애플 깎아 넣고, 이스트를 곁들인 다음에 물 부어놓으면 하룻밤 만에 발효가 끝나요. 파인애플 막걸리 맛, 기가 막히지요. 그뿐인 줄 알아요? 어떤 사람은 거무튀튀한 색깔의 막걸리를 들고 나오는데, 그건 쌀에다 물 붓고 건포도를 넣어서 만든 술이에요. 술 만드는 재주들은 기가 막히지요. 그래서 다들 그랬어요. 우리가 ‘배달의 자손’이라고 하는 건, 바로 ‘술 배달의 후손’이라는 뜻이라고….”

사우디 경력 10년을 자랑하는 김윤억 씨의 얘기다.

막걸리가 몇 순배 돌고 거나해지자 다시 흥겨운 젓가락 장단이 어우러지고 ‘고향역’으로 달리는 열차도 힘이 불끈 넘친다. 회사에서는 음주 단속에 걸리면 즉시 귀국 조치한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김윤억 씨는, 몰래 술 만들어 마신 죄로 강제 귀국 당한 사례는 보지 못했다고 얘기한다.

무엇이든 되풀이하다 보면 진화한다. 아예 증류주를 빚어서 암거래를 하는, 술 빚는 장인(匠人)이 생겨나기도 했다.

“으슥한 곳에 설치한 화덕 위에다 양철통을 올리고는, 그 속에 재료 넣고서 가스로 가열을 해요. 그러면 수증기로 증발이 됐다가 유리병 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는데, 그렇게 해서 80도짜리 독주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작은 물병에 담긴 그 증류주 값이 2만원인데 일요일이면 순식간에 동나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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