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대통령과 농업인의 날

  • 입력 2023.11.17 15:12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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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올해 정부 ‘농업인의 날 기념식’을 취재하지 못했다. 대통령실과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업전문지를 일괄 배제한 채 대통령실 출입기자단의 취재만 허용했기 때문이다. 럼피스킨 확산에도 불구하고 1,700명의 농업 관계자들을 불러 모았지만 유독 농업전문지 기자 20~30명의 입장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농민들을 위한 행사임에도 정작 농민들을 고정독자로 둔 농업전문지들엔 생생한 기사가 실릴 수 없게 됐다.

화면을 통해 접한 대통령의 기념사는 최근의 처참한 농업 현장 상황을 전혀 보듬지 못했다. “쌀값을 20만원 수준으로 회복시켰다”, “집중호우 재해복구비를 3배로 확대 지원했다”는 왜곡적 자화자찬이 이어졌고 “해외순방에 동행한 스마트팜 기업들의 수출이 3배 이상 늘었다”는 ‘번짓수 틀린’ 발언도 등장했다. 농민들의 발등엔 당장 생산비 폭등과 가격불안정의 불이 떨어져 있는데 대통령의 눈은 ‘IT’와 ‘AI’를 향하고 있었다.

정부가 모셔온 1,700명의 농업 관계자들이 대통령에게 환호를 보낸 바로 다음날, 전국에서 자비를 들여가며 자발적으로 광화문에 모인 5,000명의 농민들은 목이 터져라 “윤석열 퇴진”을 외쳤다. 박수갈채로 포장됐던 농업인의 날 기념식이 얼마나 편협하고 폐쇄적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더욱이 광화문 집회를 주최한 농민단체들에겐 ‘종북몰이’와 ‘압수수색’의 칼바람까지 불어닥치고 있다.

사실 지금의 암담한 농업 현실에서 1,700명 규모의 대형 행사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비판을 초래했다. 게다가 ‘농협중앙회장 연임’ 이슈가 민감한 시점에 농협-대통령의 접점을 만든다는 점도 논란거리였다. 하지만 이 문제를 보도한 언론은 정부로부터 ‘광고료 삭감’이라는 보복을 받았다. 역시나 현 정부의 짙은 폐쇄성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약자(농업·농촌)에 대한 무지, 편식적 여론 인식과 비우호세력 배척, 비판보도 응징. 이번 농업인의 날 행사엔 그간 국민의 신뢰를 끌어내려온 정부의 아쉬운 모습들이 응축돼 있다. 좀 더 어질고 균형 잡힌 정부가 되고자 한다면, 대통령이 귀 기울여야 할 건 주변의 박수갈채가 아니라 현장 농민들의 처절한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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