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생명을 지키며 농사를 이어온 여성농민들의 삶은 과학과 개발의 농법이 부추겨온 기후위기 사태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주고 있다. 아직 그 논리가 반듯하게 정리되진 않았지만, 논리를 만드는 첫 과정이라는 점에서 참가자들 모두 이 자리의 의미를 깊게 새기며 대화에 임했다. 여성농민들 스스로가 기후위기 극복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자각과 다짐의 장이 되기도 했다.
토론회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한국농정>·언니네텃밭여성농민생산자협동조합이 공동주관했으며 <한국농정>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정리 권순창·한우준 기자, 사진 한승호 기자
<관련기사>
‘기후재난’의 시대, 여성농민이 지켜온 가치에 주목하라② 토론
‘기후재난’의 시대, 여성농민이 지켜온 가치에 주목하라③ 인사말
초국적 농기업과 고비용 농업의 반대편에서,
지구를 식히는 여성농민
[발제] 김정열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국제조정위원
발제문의 제목이 ‘지구를 식히는 여성농민’인데 토론회 준비팀이 같이 만든 제목이다. 가장 말하고 싶은 주제는 이것이다. 여성농민에게 토지·종자·자연자원·생물다양성 등을 보장하는 것, 정보접근권·참여권·발전권 등을 보장하는 것, 농업과 사회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불평등과 차별을 없애는 것이 기후위기를 완화할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것이다.
기후위기는 농민의 삶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당장의 문제지만, 성불평등 상황 속에 여성농민에겐 기후위기가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정책 대상에서도 배제되고 있고, 건강에 있어 여성농민이 훨씬 더 불평등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걸 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가부장제의 지배 질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인간을 우위로 설정했고 땅을 돌보며 생태순환 농사를 짓는 여성농민의 노동을 비과학적이라며 농업에서 밀어냈다.
국내는 물론 국제연합(UN), 세계기상기구(IPCC) 등 국제사회에서도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는데 온실가스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올해는 역대 가장 뜨거웠던 7~8월이었다. 올해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미 배출된 온실가스로도 100년간 영향을 받는다.
농업부문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가 전체의 24%라고 한다. 어디서 나오는 걸까. 연도별로 몇 %를 따져 ‘인간활동에 의한 온실가스 배출’을 얘기하지만 난 여성농민의 관점에서 그렇게 보고 싶지 않다. 인간활동이 아니라 누구에 의한 온실가스인지 정확히 말해야 한다.
통계를 보면 1950년대부터 지구 평균기온이 굉장히 상승하기 시작했고 특히 가파르게 상승한 게 1990년대다. 1950년대는 녹색혁명이 일어나 엄청난 농약·비료·기계가 투입되고 전통적인 여성농민의 농법이 몰아내진 시기다. 1990년도는 자유무역이 본격화된 시기다. 온실가스 배출 경향과 일치한다.
세계 먹거리체계에도 주목해야 한다. 세계 먹거리가 소수의 초국적 농기업에 장악돼 있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씨앗·농약·비료·기계·항생제와 유통·소비과정까지 전 세계 몇 개 기업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이 기업들이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바로 농업부문 온실가스다.
누가 지구를 뜨겁게 하는가 하는 얘기를 분명히 하고 그런 생산방식을 바꿔야 한다. 그러지 않고선 온실가스를 줄일 수 없다. 초국적 농기업 ‘네슬레’가 엄청 발 빠르게 ‘제로2050’ 탄소중립을 선언했는데, 정작 아프리카 오지까지 뻗친 유통망은 거둬들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그린워싱’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농업인의 날 행사에서 스마트팜·IT·첨단농업을 얘기하며 “고소득산업으로 나아가자”고 했는데, 이게 지금 기후위기 시대 대통령의 인식이다.
정의로운 전환이란, 식량주권의 관점에서 농업정책을 펴야 한다는 거다. 농생태적 농사는 훨씬 에너지와 물을 덜 쓰고 온실가스를 감축한다. 그리고 생물다양성을 보장한다. 이것이 기후위기 시대 우리의 대안이라 생각한다.
초국적 농기업의 수탈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전세계 여성농민들은 토종씨앗과 생태적 농업 생산방식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 감수성을 가진 게 여성농민이다. 여성농민은 수천년 동안 생태적 지혜로 땅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공동체를 돌보는 사람들이다. 이를 외면하고 기술과 자본으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순 없다.
기후정의운동은 농민들의 참여와 상관없이 큰 물결이 됐다. 지난 4월·9월 기후정의행진에 이미 몇만명이 모이고 있다. 여기에 농민이 중심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책을 짤 건지 집단적 연대활동이 이뤄져야 한다. 식량주권에 기반한 정책을 만들어야 하고, 여성농민의 권리가 기후재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절박함과 공포감은 생애 처음”
[기후 피해사례 발표] 유화영 충남 논산 채소농가(호우 피해)
귀농한 지 8년된 초보다. 미니단호박·감자·양파 농사와 함께 토종콩과 채소를 몇 가지 기른다. 단호박 두 동 600평, 노지 600평, 논 1,000평이니 소농 중의 소농이다.
그 2,200평이 손바닥만큼의 땅도 남지 않고 다 잠겼다. 일대가 전부 잠겼는데 강도 아닌 바다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하우스 바닥에서 허리에 차오를 때까지 현장에 있었는데, 이미 수확해서 널어놓은 양파가 수장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 많은 양파를 다 들어 집으로 옮겨 거실과 방, 비가 들이치지 않는 모든 공간에 들여놓고 말리는데, 비가 들이치기 시작하니 너무 공포스럽고 절박했다. 53세 생애 그런 절박함과 공포감은 처음이었다.
다음 작물을 들이기 위해 땅이 마르기까지 한 달 정도가 소요됐다. 농사를 새로 지으려니 생전 처음 보는 병해충이 생겨났다. 분홍색, 갈색, 검은색, 흰색 등 총천연색 벌레가 창궐했다.
특별재난구역으로 선포됐지만 행정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고 감감무소식이다. 추석 직전에 한번 비가 엄청 내린 적이 있었는데 트라우마가 생겨서 밤 9시가 넘어도 하우스를 떠나지 못했다. 수로가 넘치지 않게 둑을 더 쌓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지만, 지자체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 촉구하고 항의해야 하는 상황이다.
“비 오듯 떨어지는 사과에 무너져 내린 가슴”
[기후 피해사례 발표] 김태경 경남 거창 사과농가(탄저병 피해)
농사 지으면서 올해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봄에 꽃이 폈는데 저온이 열흘 이상 지속됐다. 벌이 활동을 못하니 수정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4월 28일엔 된서리가 와서 중심과가 다 얼어버렸다.
여름철엔 비가 왔다 더웠다를 반복해 일소 피해가 왔다. 이후 처서가 지났는데 기온이 안 떨어지니 색이 나질 않았다. 탄저가 심해지고 썩음병·무름병도 심했다. 게다가 흡혈나방이라는 희한한 나방이 활동해 기존의 병충해보다 큰 피해를 줬다.
가을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는데 햇볕 받은 윗부분이 탄저·무름·썩음병으로 다 떨어진 거다. 썩은 사과를 바닥으로 던지는데 비 오는 소리처럼 들리더라. 25년 사과 농사를 지으면서 신조가 ‘하늘이 하는 일에 감정 소모 말자’였다. 태풍이 와서 나무가 뽑혀도 다시 심을 뿐 감정이 동요한 적은 없었다. 헌데 그 비오는 듯한 소리에 감정이 형언할 수 없이 북받치더라. 농사가 무너지면 여성농민들은 저임금 노동을 겸직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썩은 사과 던져놓은 것도 다 주워야 한다. 누가 하겠나. 남자는 술만 먹지 않나. 이런 모습을 보고 미래를 그리며 들어올 여성농민은 없다.
마지막으로 1,500평 400주에 보험금 받은 걸 말씀드리면, 보험료 880만원을 냈고 75% 피해산정을 받았는데 보험료가 1,000만원 나왔다. 낸 것보다 120만원 더 나온 거다. 재난의 모든 책임이 농민에게 전가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