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토종씨앗과 만나고, 먹고, 친해지게 하는 ‘주선자들’

  • 입력 2023.10.22 18:00
  • 수정 2023.10.22 19:34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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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 18일 충북 괴산군 소수면 한살림 우리씨앗농장에서 안상희 대표가 유리병에 담아 전시한 ‘토박이씨앗’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 대표는 “개별 농민 혼자만의 힘으론 토박이씨앗을 지킬 수 없다”며 한살림 차원의 토박이씨앗 지키기 운동을 제안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8일 충북 괴산군 소수면 한살림 우리씨앗농장에서 안상희 대표가 유리병에 담아 전시한 ‘토박이씨앗’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 대표는 “개별 농민 혼자만의 힘으론 토박이씨앗을 지킬 수 없다”며 한살림 차원의 토박이씨앗 지키기 운동을 제안했다. 한승호 기자

토종씨앗, 그리고 그것이 자라나 만들어진 토종작물이 진정 이 땅의 식량주권·종자주권을 위한 근간이 되려면 ‘먹어야’ 한다. 먹으려면 토종작물과 시민이 만나야 한다. 토종작물과 시민이 만나는 사례를 일부나마 소개하면서, 우리는 토종작물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

‘토박이씨앗’ 지키는 농민들의 이야기

지난 17일 한살림연합 주최로 충북 괴산군 우리씨앗농장에서 열린 ‘토박이씨앗을 지키는 농부들의 수다회’에 참가한 토박이씨앗(토종씨앗) 재배 농민들. 왼쪽부터 충북 청주 농민 홍진희씨, 청주 농민 임종래씨, 충남 부여 농민 김지숙씨, 충북 괴산 농민 박명의씨, 안상희 괴산 우리씨앗농장 대표, 우 준 한살림연합 농산물위원장(사회자).
지난 17일 한살림연합 주최로 충북 괴산군 우리씨앗농장에서 열린 ‘토박이씨앗을 지키는 농부들의 수다회’에 참가한 토박이씨앗(토종씨앗) 재배 농민들. 왼쪽부터 충북 청주 농민 홍진희씨, 청주 농민 임종래씨, 충남 부여 농민 김지숙씨, 충북 괴산 농민 박명의씨, 안상희 괴산 우리씨앗농장 대표, 우 준 한살림연합 농산물위원장(사회자).

지난 17일 한살림연합(상임대표 권옥자, 한살림) 주최로 충북 괴산군 우리씨앗농장에서 열린 ‘토박이씨앗을 지키는 농부들의 수다회’. 이 자리에선 ‘토박이씨앗(한살림에선 토종씨앗을 토박이씨앗이라고 부른다)’을 보전·재배하는 한살림 생산자들이 모여 각자 재배한 토종작물을 어떻게 시민에게 전하려 노력했는지, 그 과정의 시행착오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충북 청주 농민 임종래씨는 과거 청주지역 토종작물 재배 농가들이 의기투합해 7~9가지 과채류를 꾸러미로 만들어 수도권 조합원들과 교류해보자는 계획을 세웠던 바 있다. 당시 임종래씨 등 청주 농민들의 계획은 “1주일에 2회씩 적게는 60~70개, 많게는 200개의 꾸러미를 만들어 공급하자”는 것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임종래씨는 “실상 (꾸러미 사업을) 해보니 우리는 사실상 ‘사기 치는 토박이농부’가 됐다”고 한 뒤 “꾸러미를 준비할 때마다 확인해 보면, 당초 조합원들에게 홍보하고 예약받았던 것보다 물량이 안 갖춰졌다. 그 사이 쥐가 파먹거나 고라니가 두들겨 깨서 보낼 수 있는 토종작물이 줄어든 것이다. 향 좋고 당도도 높은 사과참외는 굼벵이들이 흠집내고 새들도, 쥐들도 탐내더라”라며 균과 굼벵이 등에 의해 ‘못난이’가 된 사과참외를 들어 보였다.

괴산 농민 박명의씨도 2010년대 초반 괴산·청주지역 70여 농가가 토박이씨앗 꾸러미 보급에 나섰던 일화를 이야기했다. 박명의씨는 “생산자들이 주시는 대로 먹겠다”던 조합원의 말에 감동했던 기억, 그러나 4월에 토박이씨앗 꾸러미를 꾸리려니 넣을 물품이 없던 기억(박명의씨가 몸담은 생산자공동체가 위치한 지역은 4월까지도 추운 날씨라 작물이 계획대로 자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꾸러미를 어떻게든 꾸리려고 산나물을 채취하던 기억 등을 풀었다.

박명의씨는 점차 조합원들의 식생활이 변해가고, 직장 다니기 바빠 토박이작물을 요리해 먹기 어려운 조합원들이 꾸러미 받는 걸 부담스러워했던 상황, 그 과정에서 토박이작물 재배의 어려움으로 생산자들이 점차 줄어 결국 ‘꾸러미 결의’ 농가 중 본인과 귀농한 사람 2명만 남았던 상황도 이야기했다.

“토박이씨앗물품, 요리해 먹자” 한살림의 ‘토박이씨앗’ 보전 활동

각종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토박이 농사’를 이어가는 농민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한살림은 점차 ‘토박이씨앗 보전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토박이씨앗 보전·채종 역할을 수행하는 한살림 공공농장인 괴산 우리씨앗농장에 대한 후원, 토박이씨앗물품 홍보·판매 강화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이 다름 아닌 ‘토박이씨앗살림밥상’ 개발이다.

지난해 6월 한살림 식생활센터(센터장 박소현)는 요리책자 <한살림이 제안하는 살림밥상 차림>을 발간했다. 이 책자의 ‘토박이씨앗살림밥상’ 꼭지엔 한살림 생산자들이 공급한 토박이씨앗물품을 활용해 만든 각종 요리가 소개돼 있다.

눈여겨볼 점은, 소개된 요리 중엔 이 땅에서 자라난 토박이씨앗물품으로 오늘날 일상에서 접하는 먹거리를 구현해 낸 것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각종 토박이콩(선비콩·밤콩·아주까리콩·쥐눈이콩 각각 25g씩)을 활용해 만든 ‘토박이콩스프’, 토종밀의 대명사인 앉은키밀(과거엔 ‘앉은뱅이밀’이라 불렸으나 장애인 비하 표현이기에 앉은키밀로 순화됨) 가루를 유정란과 섞어 만든 ‘앉은키밀 컵케이크’, 아주까리밤콩·베틀콩·쥐눈이콩·호랑이콩으로 만든 토종 청국장을 활용해 만든 ‘토박이콩 청국장 파스타’ 등을 들 수 있겠다.

토박이씨앗살림밥상 요리들은 2018~2021년 한살림 식생활센터의 각종 활동 및 사업 과정에서 조합원·실무자 등으로부터 모아낸 요리법들이다. 말하자면 한살림 차원에서 자생적으로 토박이씨앗 기반 요리 개발에 앞장섰다고 볼 수 있다.

토종씨앗 기반 ‘새로운 먹거리’

지난해 4월 5일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맑은숲 한옥펜션 저잣거리에서 열린 제7회 전국 토종벼 농부대회 행사 중 진행된 토종쌀 막걸리 시음회.
지난해 4월 5일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맑은숲 한옥펜션 저잣거리에서 열린 제7회 전국 토종벼 농부대회 행사 중 진행된 토종쌀 막걸리 시음회.

한편 전국 각지에서 토종작물 등 지역 먹거리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토종씨앗 기반 ‘새로운 먹거리’의 개발·홍보 및 보급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450종의 토종벼를 재배하며 사라져가는 토종벼의 ‘지킴이’ 역할을 해 온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경기 양평)는 최근 토종쌀 막걸리 워크숍을 통해 다양한 시민에게 ‘토종쌀과의 만남’ 기회를 주선하고, 나아가 그 쌀로 전통 막걸리를 빚을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 중이다. 이근이 대표는 최근 토종쌀과의 ‘만남의 광장’으로서 토종쌀·지역특산주 복합문화공간 ‘우보주책’을 양평군 용문역 인근에 개설했다.

워크숍에선 토종쌀의 활용 가능성 및 품종별 특징 소개 뒤 참가자들과 함께 품종별 쌀을 씻고 불리는 작업을 한다. 연이어 토종벼로 고두밥을 지어보고, 품종별 막걸리를 마셔보고, 토종쌀밥을 먹어보고, 토종쌀로 만든 누룩 혼화 막걸리를 마셔보면서, 토종벼의 이름조차 알기 어려웠던 참가자들은 토종벼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지난 7월과 8월에 열린 토종쌀 막걸리 워크숍엔 총 70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경남 거창군의 카페 아날에서 판매 중인 토종팔빙수. 이 팥빙수의 팥은 거창 여성농민들이 재배해 온 토종팥이다. 카페 아날 제공
경남 거창군의 카페 아날에서 판매 중인 토종팔빙수. 이 팥빙수의 팥은 거창 여성농민들이 재배해 온 토종팥이다. 카페 아날 제공

경남 거창군 거창읍의 카페 아날(운영 주체 아날협동조합, 아날은 `아줌마 날다'의 약칭)에선 거창에서 여성농민들이 재배한 토종 팥·콩으로 만든 간식거리를 판다. 거창군여성농민회는 과거부터 거창의 토종씨앗을 수집·보급해 왔는데, 여러 토종팥 씨앗 중 특히 맛이 좋은 편인 재팥·흰팥 등의 활성화에 나서보자는 취지 아래 ‘토종 디저트’를 개발했다.

아날이 특히 주력으로 미는 메뉴는 토종팥빙수와 쌀호두과자다. 토종팥빙수는 토종팥 2종에 유기원당을 넣고 직접 졸여 만든 팥빙수로, 깊고 진한 맛이 특징이다. 쌀호두과자는 쌀반죽에 토종팥과 슈크림 등을 곁들여 만든 호두과자다. 아날에선 그밖에도 토종팥찐빵도 만들어 팔고 있다.

한편 ㈜어콜렉티브가 운영하는 브랜드 ‘곡물집(공동대표 천재박·김현정)’은 충남 공주시 구 도심에서 토종곡물 체험 공간을 운영하면서, 지역 농민들로부터 공급받은 토종작물을 활용해 다양한 음료와 간식을 선보인다. 곡물집은 또한 시민에게 토종곡물을 직접 맛보게 하고 곡물의 특징 및 조리법을 설명하는 키트인 ‘토종곡물 경험키트’를 제공한 바 있으며, 최근엔 온라인에서 재래율무·선비잡이콩·베틀콩·등틔기콩·재팥·늘보리·차조·칠기장 등 8종의 토종곡물을 원하는 단위(200g, 500g)에 맞춰 구매할 수 있게 했다.

토종씨앗 많이 만나게 할 ‘운동’ 절실

지난 6일 전북 김제시 종자산업진흥센터 일원에서 열린 2023 국제종자박람회 행사장에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북도연합이 차린 토종씨앗 부스에 진열된 각종 토종작물들.
지난 6일 전북 김제시 종자산업진흥센터 일원에서 열린 2023 국제종자박람회 행사장에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북도연합이 차린 토종씨앗 부스에 진열된 각종 토종작물들.

다시 17일 괴산 우리씨앗농장 수다회로 돌아와 보자. 이날 참가자들은 토박이씨앗이 더 널리 시민 속으로 퍼지려면 ‘운동적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한살림 생산자이자 부여군여성농민회(회장 양율희, 부여여농) 소속이기도 한 충남 부여군 여성농민 김지숙씨는 부여여농의 토종씨앗 지키기 활동을 소개했다. 김지숙씨는 부여여농 회원들이 △2008년 이래 15년간 진행된 토종씨앗 채종포 운영 △‘1여성농민 1토종 지키기’ 운동 △토종씨앗 실태조사 △토종씨앗 축제를 통한 대(對)시민 토종씨앗 알리기 등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밝혔다. 토종씨앗 채종포의 경우 부여군 초촌면과 옥산면에 마련됐는데, 이곳은 부여여농 및 충남지역 한살림 소비자 조합원, 한살림 부여군 여성농민들이 함께 운영한다.

부여여농은 지난 14일 부여군 임천면 만세장터에서 열린 보부상 축제 때 토박이씨앗 전시 부스를 차려 다양한 작물을 주민들에게 선보였는데, 부스에서 사과참외를 접한 어르신이 어린 시절 먹은 참외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부여여농은 오는 12월 8일 토박이씨앗 축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김지숙씨는 이상의 사례를 소개하며 “사라져가는 토종씨앗의 재배·채종 권리를 농민이 가져야 하건만 종자회사로 그 권리가 넘어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에,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회장 양옥희, 전여농)은 토종종자를 지키는 것이 식량주권을 지키는 길이라 여기며 토종씨앗 지키기 활동을 ‘운동’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밝혔다.

안상희 괴산 우리씨앗농장 대표 역시 “토박이씨앗 보전활동을 종자주권·식량주권과 생태계 종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한살림의 운동으로, 나아가 국민적 운동으로 전개시켜 나갔으면 한다”며 “한살림 차원에서도 생산 농가당 1~2품목씩 토박이씨앗 지키기 운동을 펼치면 좋겠다. 개별 농민 혼자만의 힘으론 토박이씨앗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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