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3~5명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는 충북 괴산 박형백씨의 복숭아 출하 사무실. 예년 이맘때면 매일 100상자씩 출하하느라 분주했겠지만 박씨는 한가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았다. 냉해와 폭우, 병충해 등 한 해를 관통한 재해의 영향으로 수확량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1일 20~30상자 출하가 고작이며 심지어 이날은 작업물량이 아예 없는 날이었다.
박씨는 로컬푸드·생협·관행유통 등으로 복숭아를 나눠 출하해 왔다. 하지만 하루 20상자면 로컬푸드 한 군데 납품으로 끝나는 양이다. 생협 납품 차질로만 하루에 1,000만원 가까운 매출손실이 나고 있다.
그나마 납품하는 물량도 클레임이 줄을 잇는다. 박씨는 “외관이 울퉁불퉁한 건 냉해 때문이지만 더 골치는 비다. 과일이 밖에서부터 썩는 게 아니라 안에서부터 썩으니, 출하할 땐 멀쩡하던 게 소비자에게 도착하면 문제가 생기는 거다. 농민들로선 도리가 없는 문제”라고 호소했다.
괴산은 지난 7월 대규모 홍수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홍수는 7월 15일이었지만 그 전후로도 비는 꾸준히 내렸다. 당도가 떨어진 ‘물복숭아’는 당연히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당도가 회복된 지난달 중순부터는 착과불량·부패·낙과현상 때문에 정작 내다 팔 물량이 없어졌다.
복숭아는 제수용품은 아니지만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일이라 선물용으로 수요가 많다. 한 농가가 수확시기별로 여러 품종을 안배해 재배하기 때문에 6월부터 9월까지 출하가 계속 이뤄지긴 하지만, ‘명절 특수’가 확실히 존재하는 품목이다. 그러나 올 추석만큼은 특수를 누리는 농가가 극히 드물다.
박씨는 최근 몇 년의 농업 환경을 “재해의 일상화”라고 표현했다. 그는 “20년 전 농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재해가 이렇게 중첩되는 일은 없었다. 기존에 쌓아온 농사 데이터, 작업 적기가 이젠 맞지 않게 됐고 그저 색깔 보고 때가 된 것 같으면 거기에 따라가기 급급하다”며 “기후위기의 제일 큰 피해자는 과수농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량이 적고 흠과가 많아도 수확작업을 그만둘 수는 없다. 과실을 제때 따내지 않으면 내년에 꽃눈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농민들에게 한층 크게 와닿는 건 역시 ‘품위별 가격 양극화’다. 크고 예쁜 과일을 선호하는 국내 과일 소비풍조가 상품-하품 가격을 왜곡시키고 있으며 올해처럼 상품이 드물 때 이것이 농민들에게 더 큰 족쇄가 되기 때문이다.
박씨는 “‘눈으로 먹는 과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조금 못생겨도 맛있으면 괜찮다’라는 인식이 퍼진다면 소비자에게도, 농민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지금 같은 풍조라면 소비자들은 계속 비싼 과일을 먹을 수밖에 없다”고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