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슬쩍 민간에 농산물 수급조절 책임 떠넘기려는 정부

  • 입력 2023.08.06 18:00
  • 수정 2023.08.06 19:05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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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 5월 11일 ‘마늘 양파 TRQ 반대’, ‘농업을 포기한 대통령 거부한다’ 등이 적힌 상복을 입고 전국마늘양파생산자대회에 참석한 한 농민이 ‘마늘 양파 생산비 보장’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5월 11일 ‘마늘 양파 TRQ 반대’, ‘농업을 포기한 대통령 거부한다’ 등이 적힌 상복을 입고 전국마늘양파생산자대회에 참석한 한 농민이 ‘마늘 양파 생산비 보장’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산물 관련 정책 전반(수급조절, 농산물 수출입정책 등)에서 국가가 점차 책임을 ‘민간’으로 떠밀고 있다.

‘자율적 수급관리체계 구축’ 시도, 예의주시해야

우선, 농산물 수급조절 분야에서 민간영역의 책임을 강조하며 은근슬쩍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듯한 기조가 보인다.

최근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정황근, 농식품부)가 발표한 ‘원예농산물 수급관리 고도화 방안(고도화방안)’에서도 이런 기조가 확인된다. 농식품부는 고도화방안에서 농산자조금 제도 개편을 표방하면서, 의무자조금단체는 품목 특성을 고려해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이행하게끔 하는 내용을 담았다. 정부는 의무자조금단체가 수립한 발전계획에 대한 평가 결과를 근거로 자조금단체와의 연계자금을 차등지원하는 ‘성과평가 제도화’를 추진하고자 한다.

명분은 의무자조금단체의 대표성·책임성을 강화하려는 것이지만, ‘성과평가 제도화’ 추진 과정에서 정부가 단체를 길들이려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 정책에 부합하는 발전계획을 내놓은 단체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정부가 부담스러워하는 수급조절 노력을 더 기울이는 단체가 높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도화방안에 포함된 ‘지역자조금 도입’ 내용 역시 제대로 실행이 된다면 지역단위 농산물 수급조절에 긍정적 기여를 할 테지만, 지역자조금이 확실히 농산물 수급조절에 기여하려면 정부의 역할은 빠져선 안 된다. 그러나 아직 관련 예산을 어떤 식으로 확보하고 분담할지, 실행체계는 어떻게 세울지에 대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자단체들은 정부가 지자체 및 지역농협, 생산자단체 등에 지역 농산물 수급조절 책임을 떠넘기진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수급관리 고도화를 위한 구체적 ‘가격정책’ 설계 없이 생산자단체의 책임 강화부터 강조하는 것 역시 정부 책임을 경감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은 최근 고도화방안에 대한 의견을 내놓으면서 “미국의 가격손실보전(PLC)과 같은, 농가 농업소득을 최소한의 선에서 보장할 수 있는 가격정책의 설계가 선행돼야 시장에 정부의 가격안정에 대한 확실한 신호를 줄 수 있다”며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의 개정 등을 통해 가격정책 제도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격정책의 재원으로서 감축대상보조(AMS) 1조4,900억원을 활용하게 하는 등 정부 책임성 및 역할에 대한 규정이 포함돼야 한다는 게 녀름의 입장이다. 이러한 재원 마련 및 활용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의무자조금을 통한 자율적 수급조절 추진은 현행 사업비 자체의 한계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부의 핵심 수급조절 정책, ‘수입’

정부가 수급조절 정책에서 완전히 손 뗀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정부 수급조절 정책의 핵심이 ‘수입’이라는 점이다. 정부는 농산물 가격이 조금만 높아졌다 하면 ‘물가안정’ 명목으로 저율할당관세(TRQ) 기본물량을 늘리는 식으로 수입농산물을 들여온다.

녀름이 지난 5월 19일 발표한 보고서 <TRQ 증량, 농산물 수입의존 정책에 대한 문제의식>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양파 시장접근물량을 현행 2만645톤에서 4만645톤으로 2만톤 늘리려 한다. 기획재정부령 <시장접근물량 접근에 관한 규칙> 제4조에 따르면, 정부는 TRQ 증량 시 해당 품목 생산농가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주무부 장관(농식품부 장관)이 TRQ 증량을 요청할 시 증량이 생산농가에 미치는 영향 등의 내용을 기재부 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선 농민에게 미치는 단기적·장기적 영향이 제대로 분석되고 있는지, 기재부는 이를 제대로 검토하는지 의심된다.

농식품부 고도화방안에서도 ‘수입규제’ 관련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녀름 측은 “‘물가관리’ 명목으로 TRQ 물량을 수시로 확대하는 것이 산지가격 하락의 중요 요인이라는 점은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경작신고제를 통해 생산조절 노력을 기울이는 전국양파생산자협회 또한, TRQ 증량으로 가격보장이 불가능한 여건을 조성하면서 농민에게만 의무(경작신고제 강화,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 등)를 다하라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정부 차원에서 식량자급률 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가정하에, 필요한 농산물이 부족하다면 부득불 수입정책을 고려하지 않을 순 없다. 그러나 농산물 수입 역시 정부가 직접 통제해야 할 영역이건만, 정부는 이 영역의 책임자로서 민간 대기업을 호명한다.

현재 농식품부는 ‘민간기업의 해외 공급망 확보 지원’ 명목하에 민간기업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해외곡물 유통망 확보를 위해 500억원 예산을 들여 대기업에 저금리 융자정책을 실시 중인데, 특히 올해 2개소인 ‘해외 곡물 엘리베이터’를 2027년까지 5개소로 늘리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해외의 국내 기업 곡물 엘리베이터는 포스코가 우크라이나에서, 하림 팬오션이 미국에서 각각 운영한다.

정작 농식품부가 2027년까지 확보하려는 3개 곡물 엘리베이터의 운영을 담당할 기업을 올해 상반기 모집했지만 단 한 곳도 신청하지 않았다. 농식품부 측은 하반기에 재신청을 받을 예정인데, 신청 기업이 없을 시 1개월씩 신청기한을 연장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운영기업을 확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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