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시대, ‘국가 책임 농정’이 절실하다

  • 입력 2023.08.06 18:00
  • 수정 2023.08.06 19:27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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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정부의 전략작물직불제 시행에 맞춰 1만6,000여평 논에 콩을 심은 김종섭(63, 전북 익산시 함열읍)씨가 지난 2일 침수 피해를 입어 콩대만 남은 논을 트랙터로 갈아엎고 있다. 김씨는 “논에 들어찬 물이 엿새 동안이나 빠지지 않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시에서 종자를 무료로 공급한다고 다시 콩을 심어보라는데 수확이 될지 잘 모르지만 시도는 해보려고 한다”며 착잡한 심정을 전했다. 한승호 기자
정부의 전략작물직불제 시행에 맞춰 1만6,000여평 논에 콩을 심은 김종섭(63, 전북 익산시 함열읍)씨가 지난 2일 침수 피해를 입어 콩대만 남은 논을 트랙터로 갈아엎고 있다. 김씨는 “논에 들어찬 물이 엿새 동안이나 빠지지 않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시에서 종자를 무료로 공급한다고 다시 콩을 심어보라는데 수확이 될지 잘 모르지만 시도는 해보려고 한다”며 착잡한 심정을 전했다. 한승호 기자

지난달 7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새로운 법안에 서명했다. 필리핀 농민 약 61만명의 부채 전액 탕감 내용을 담은 공화국법 제11953호, 일명 ‘신농민해방법(New Agrarian Emancipation Act)’을 공식화하는 서명이었다.

신농민해방법은 지난 시기 필리핀 정부의 포괄적 농업 개혁 프로그램에 따라 농지를 분배받으며 국가에 대출 원금과 이자 부담을 지게 된 농민(소위 ‘농업개혁수혜자’)이 진 부채를 전부 탕감하는 내용을 담았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공교롭게도 마르코스 주니어 현 대통령의 부친이다)의 독재정치가 민주화혁명으로 끝난 직후인 1988년, 코라손 아키노 정부는 토지개혁 프로그램에 따라 농민이 토지대금을 30년 후 상환케하는 조건으로 토지를 나눴으나,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농민 다수는 토지대금을 제때 상환하지 못해 원금 채무 및 이자 부담에 시달렸다.

이에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최근 “농민들이 막대한 부채를 갚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정부가 이들의 빚을 부담하는 게 옳다”고 말하며 신농민해방법에 서명했다.

필리핀 전국의 농업개혁수혜자는 61만여명으로, 이들은 필리핀 국토의 16%에 달하는 약 117만3,000ha 농지에서 농사짓는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신농민해방법에 서명함에 따라 농업개혁수혜자들이 진 농가부채 575억 페소(한화 약 1조3,474억원)는 전액 탕감된다.

물론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의 서명 하나로 필리핀 농민이 겪는 모든 어려움이 해결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우리가 ‘후진국’으로 분류해 온 필리핀이, 어려운 경제조건에도 농민의 생활을 직접 책임지겠다며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농가부채 탕감 결정을 내린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재자의 자식으로서 부친의 온갖 만행을 두둔하느라 국제사회에서 악평을 받는 ‘필리핀의 박근혜’도 국가 책임 농정을 해보려고 온갖 애를 쓰는 판에, 필리핀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인 대한민국의 현 대통령은 오히려 농정 영역에서 국가 책임을 거둬가기에 급급하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농가부채 탕감을 위한 법안에 서명한 것과 달리, 대한민국의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 쌀값 폭락 방지를 위한 각종 조치를 담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양곡관리법 개정 거부 논리의 일환으로 농민의 ‘도덕적 해이’ 문제를 거론했다. 정부는 ‘남아도는 쌀’을 더는 책임질 수 없으니 논에서 다른 농사를 지으라고 했고, 스마트팜에 눈을 돌리라고 했다.

벼 재배농가의 농사 지속을 위한 최소한의 보호망인 추곡수매제, 변동직불제, 명확한 기준에 따른 쌀 시장격리조치 등 대책은 어느 하나 없고, 밭작물로 눈을 돌리자니 재배하는 작물마다 물가안정 명목으로 수입조치가 단행되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정부가 전략작물로 내민 논콩을 심었다. 그 논콩은 지난달 수해로 고스란히 물에 잠기며 성장을 멈췄다. 정부가 이렇다 할 ‘전략’ 없이 논콩을 심으라고 강권한 대가였다.

지난달 15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한 충남 논산 농민 서재식씨도 필리핀 신농민해방법 사례를 들며 국가 책임 농정 실현을 촉구했다. 서씨를 비롯한 농민들은 기후재난을 맞닥뜨린 이 시점에서 더욱 국가 책임 농정이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든 농정 영역에서 국가 책임을 털어내고자 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농민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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