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자급 안 챙기는 국가, 라면값·빵값도 지켜주지 못한다”

인터뷰 l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 입력 2023.06.09 08:50
  • 수정 2023.06.09 08:56
  • 기자명 김수나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들녘의 농번기가 지나가면 도심의 농번기가 시작된다. 이른바 ‘아스팔트 농사’다. 사시사철 바쁜 틈틈이 농민들은 국회와 대통령실, 도청과 시·군청 앞에 모여 ‘농산물 가격·생산비 보장’, ‘식량주권 사수’ 등을 끊임없이 외친다. 이 외침이 당국과 시민에게 얼마나 가 닿았을까. 모두가 살기 힘든 이 시대에 농민만 봐달란 뜻인가? 농민들의 외침이 왜 모두의 외침일 수밖에 없는지, 지난달 16일 서울 용산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사무실에서 이근혁 전농 정책위원장에게 들어봤다.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한승호 기자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한승호 기자

농민들은 ‘온 나라가 농업을 홀대한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래서일까? 농민들의 끈질긴 요구에 견줘 사회적 관심이 적다. 농민의 문제가 어떻게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까?

‘왜 농업만 지원하냐’, ‘비싸게 사 먹을 순 없으니 수입해서라도 싸게 먹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정치권은 여기에 편승해 TRQ(저율관세할당)로 농산물을 수입하는 근거로 삼는다. ‘농사인구 약 4%가 희생해 96%가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니냐’ 할지 모르나, 결국엔 국민이 피해를 본다.

밀이 대표적 사례다. 정부가 밀 자급률을 내던지고 철저히 시장에 맡기면서 자급률은 0.8%다. 이 상태에서 2022년 밀값이 세 배 정도 폭등하면서 라면, 빵, 국수 등 밀가루 식품값이 급등했다. 폭등한 라면값, 빵값을 국가가 책임졌나? 아니다. 국민이 고스란히 자기 돈 들여 감당해 냈다. 이것이 바로 식량주권, 식량안보를 지키지 못한 결과다. 수입 농산물을 싸게 사면 당장 이익인 것 같지만 5년, 10년 뒤엔 그 피해는 오롯이 국민 몫이란 걸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국산 없으면 수입산 먹으면 된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전쟁위기·기후위기 속에서 언제나 싼 가격에 수입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쌀 자급률이 84.6%라도 되니 밀값 폭등에도 완충이 됐던 거다. 농산물은 식량주권과 식량안보로 접근해야 한다. 당장 싼 가격만 생각하면 결국 농업 기반까지 무너진다. 이번엔 밀이지만 자급률을 지켜내지 못하면 그 뒤엔 쌀이 무너지고 채소류 등 다른 농산물도 잇달아 무너진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들 하잖나.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 전쟁, 기후위기로 인한 곡물 생산 감소로 외국 농산물이 쉬이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을 겪었다. 국산 농산물로 만든 집밥에 대한 호응도 더 커졌다. 감염병, 전쟁, 기후위기라는 세 위기를 모두 잘 알게 됐다. 이 위기는 수입 일변도의 식량정책, 농정방향을 돌아보고 식량자급의 중요성을 깨닫는 기회가 됐다. 그런데도 언제든 농산물을 수입할 수 있다고 보는 정치인들의 무개념이 가장 문제다.

라면값, 빵값 얘길 들으니 농민들의 요구가 바로 와닿는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인가?

폭등한 생산비를 지원하는 제도다. 상황에 따른 일시 지원이 아닌 법률과 조례로 안정적이고 충분히 지원해야 한다. 모든 농자재를 포함한 전체 생산비는 평균 28.4% 이상 올랐다. 2020년보다 인건비 약 70%, 비료값 200%, 기름값 103% 정도 폭등했다. 정부와 지자체, 농협이 비료값 80% 정도를 지원한 것을 감안해도 농민들이 실제로 감당해야 하는 인상률은 40~50%에 달한다. 폭등한 생산비에 견줘 실제 지원 예산이 매우 적다. 농산물 가격이라도 좋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못하다. 폭등한 생산비는 오롯이 농민의 짐이 됐다.

예를 들면 마늘값·양파값 오른다고 저율할당관세로 수입한다. 양파는 아직 생산도 안 됐는데 말이다. 생산비 대책은 없고 물가 잡는다는 이유로 농산물을 수입해 국산 농산물 가격만 잡는다. 농민들은 이 상황을 ‘논밭을 팔아 이자를 갚는 형국’이라고 표현한다. 농사 소득으로 먹고살고 농협 이자도 갚아야 하는데,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농업을 더는 지속할 수 없다. 농민들 상황은 이 정도로 위기다.

생산비를 지원하는 법과 조례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지금도 각 지자체엔 관련 조례들이 꽤 있다. 어떤 보완이 더 필요한가?

지금의 지원은 미미하고 일시적이다. 생산비 폭등을 충분히 반영하는 보전이 필요하다. 필수농자재를 지원하는 법과 조례를 제정해 지속해서 안정적으로 지원하라는 것이다. 비료값의 경우 정부가 2023년 예산을 잡을 때 1,000억원만 배정했는데, 이 정도면 상반기 지원밖엔 안 된다. 그것도 추경으로밖에 할 수 없게 돼 있다. 생산비 폭등은 한시적 문제가 아니다. 한 번 오른 생산비는 오르면 오르지 떨어지진 않는다. 또 매년 예산 세울 때마다 반복해서 요구하고 싸우는 건 너무 소모적이다.

일부 지자체의 농업인경영안정자금 지원 조례나 벼 재배농가 경영안정자금 지원 조례 등도 정부나 지자체 주도가 아닌 주민조례청구로 제정된 것이다. 쌀값 폭락, 기상이변과 같은 상황에도 안정적으로 농사짓게 하려는 장치다. 완벽하진 않지만 농민과 주민이 청구했다는 본연의 취지를 살려 유지되고 있다. 벼뿐 아니라 마늘, 양파 등 다른 작목도 벼만큼 확대되면 좋겠다. 음성군의 농축산물 가격안정기금 설치와 운용에 관한 조례나 충청남도 농산물 가격안정제 등도 있는데 보장 품목을 늘리고 예산도 더 충분해야 한다. 기존 제도나 조례도 형식이 아닌 농민에게 실제 도움이 되도록 탈바꿈해야 한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