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농민기본법이 담고자 하는 ‘기본’은?

  • 입력 2022.10.02 18:00
  • 수정 2022.10.02 18:4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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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현재 준비 중인「농민·농업·농촌정책기본법(농민기본법)」은 기존「농업·농촌 및 식품산업기본법(농업식품기본법)」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을까? 오랜 준비 끝에 지난달 농민운동 주체들이 마련한 농민기본법 초안 속에 담긴 ‘기본’들을 살펴보자.

농민기본법의 ‘농민’ 규정

농업식품기본법은 ‘농업인’의 범주를 △1,000㎡ 이상의 농지를 경영하는 사람 △농업경영을 통한 농산물 연간 판매액이 120만원 이상인 사람 등으로 한정지었다. 반면 농민기본법안은 ‘실제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농촌에 거주하는 이들 모두를 ‘농민’으로 포괄한다. 농민기본법안 제3조에선 농민을 정의하면서 “1,000㎡ 미만의 농지에서 농작물을 재배해도 판매를 목적으로 하고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은 농민 범주에 포함시킨다”고 명시한다.

눈여겨볼 점은, 농민기본법안은 국제연합(유엔) 농민권리선언의 관점을 차용해, 그동안 법적으로 사실상 배제됐던 농촌 내 외국인도 농민기본법 상의 ‘농민’ 정의에 들어맞는 사람이라면 ‘체류자격에 관계없이(제3조)’ 농민 범주에 포함시킨다는 점이다.

농민기본법안 제2장에선 기존 농업식품기본법엔 없었던 ‘농민의 권리’ 내용을 대대적으로 추가했다. 제2장에서 명시된 권리는 △종자권 △안전하게 농사지을 권리 △유전자변형생물체(GMO)로부터의 보호 △농업에 필요한 깨끗한 물을 무상 공급받을 권리 △농산물 가공권 △농업노동자의 권리 등이다.

종자권

종자권을 명시하는 제8조에선 ‘토종씨앗 보전’ 관련 내용이 돋보인다. 농민은 농가에서 보존한 종자를 보관·활용·교환·판매할 종자권을 가지며, 국가·지자체는 토종종자의 사용 확대 및 생물다양성 증진을 위한 조치를 취하고 농민이 양질의 종자를 파종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명시됐다. 제7절 제84조에서도 토종종자 등 재래종 농업 유전자원의 다양성 보존 및 국내 유전자원의 공정·공평한 공유에 필요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농업노동자의 권리

제13·14조는 각각 농업노동자, 외국인 농업노동자의 권리를 못 박는다. 제13조는 그동안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던 농업노동자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권리 및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제14조는 근로관계에 있어 외국인 노동자가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식량주권

밀알영농조합법인의 ‘토종 우리밀 축제’를 찾은 체험객들이 지난 6월 6일 경남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밀밭에서 밀을 불에 살라 먹는 밀사리 체험을 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밀알영농조합법인의 ‘토종 우리밀 축제’를 찾은 체험객들이 지난 6월 6일 경남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밀밭에서 밀을 불에 살라 먹는 밀사리 체험을 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민기본법안의 핵심 내용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식량주권’ 실현 관련 내용이다.

농민기본법안 제4장 제2절은 아예 ‘식량주권 실현 및 식량자급 달성’이라는 제목으로 새로 추가됐다. 해당 절 제34조에선 ‘국가 식량자급 목표’로서, 국가는 2050년까지 곡물자급률(사료곡물 포함) 60%, 열량 자급률(국민이 섭취하는 전체 식품 열량 중 국내산 식품으로 충당되는 열량 비율) 80%를 달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제36조에선 중장기·품목별 식량자급 목표 달성을 위해 매년 식량자급 목표의 이행현황을 점검하고 그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고 밝혀놨다. 또한 제37조에선 식량자급률이 낮은 농산물(예컨대 밀·콩)의 자급률 강화를 위해 국가·지자체 또는 공공기관 집단급식시설 등에서 국산 농산물 및 그 가공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요청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농산물 자급률 확보 및 가격안정을 위한 ‘계약재배’ 내용을 거론한 제38조도 눈에 띈다. 국가·지자체는 농산물 자급률 확보를 위해 필요할 시 안정적 생산과 수급조절을 위해 해당 품목의 계약재배를 장려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편으로 농민기본법안은 식량주권 실현계획 수립에 나서야 할 정부 측 주체를 한 단계 높였다. 농업식품기본법에선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발전계획)’의 수립 주체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밝혔던 반면, 농민기본법안 제25조에선 ‘농민·농업·농촌정책 기본계획(기본계획)’의 수립 주체를 국무총리로 언급해, 농업·농촌 정책에 대한 정부의 책임성을 한층 강화할 것을 명시한다.

건강한 농산물 공급 위한 국가의 책무

농민기본법안 제3절에선 처음으로 참여인증체계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제40조). 참여인증체계는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농사과정을 살피는 인증체계로서 한살림연합 등에서 시행 중이다. 기존 친환경농산물 인증제가 ‘안전한 농산물 공급’을 강조하며 농약 검출 여부부터 따지는 ‘결과 중심 인증체계’였다는 인식하에, 농민기본법안에선 국가·지자체가 생태적 방법으로 생산한 농산물에 대해 적절한 평가가 이뤄지도록 참여를 촉진하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으로 유전자변형생물체·농산물(GMO)에 대한 어떤 내용도 찾아볼 수 없던 농업식품기본법과 달리, 농민기본법안에선 GMO 관련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도 추가됐다. 제10조에선 국가·지자체가 GMO로 인한 농민·농촌주민의 건강 위해 발생, 작물재배 환경 저해, 토종동식물 오염, 생물다양성 훼손 등의 예방 및 피해 복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제44조에선 “필요할 시 GMO 표시 대상 농산물을 수거해 조사하고 유통금지조치 등을 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구체화된 여성농민 권리

지난 8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앞에서 열린 ‘윤석열 농업정책 규탄! 여성농민 법적지위 보장! 농민기본법 제정! 전국 여성농민 기자회견’에서 여성농민들이 법적지위 보장 등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8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청 앞에서 열린 ‘윤석열 농업정책 규탄! 여성농민 법적지위 보장! 농민기본법 제정! 전국 여성농민 기자회견’에서 여성농민들이 법적지위 보장 등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기존 농업식품기본법에도 여성 ‘농업인’에 대한 내용은 담겼지만, 기존 법은 여성농업인의 농업정책 설계·시행 시 참여 확대 및 사회·경제적 지위 인정에 대해 지극히 원론적 수준의 언급만 담겨 있었다(농업식품기본법 제27조). 반면 농민기본법안에선 훨씬 구체적으로 여성농민의 권리 보장 및 평등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았다.

제4절 제52조 ‘여성농민의 평등권 보장’ 조항에선 여성농민에 대한 △농업노동에서의 성차별 제거,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 실현 △농협 및 품목별 생산자협의회 등 생산자단체에서의 동등한 의사결정 참여와 금융이용기회 마련 △주민자치조직 내 의사결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권리 등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지자체가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또한 제7절 제80조 ‘농업투입재 산업 육성 및 기계화·시설현대화 촉진’에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계화 정책의 일환으로, 여성이 사용하기 적합한 농기계 구조개선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여성농민 권리와 관련해 주목할 내용 중 하나가 제53조 ‘가족농 구성원의 평등한 권리 보장’ 중 “가족농 구성원인 부부 또는 결혼과 유사한 공동체를 구성한 쌍방 사이에선 농지·농업 생산설비에 대해 부부 또는 쌍방의 공유로 하는 약정을 한 것으로 본다”는 조항이다. 여성농민의 공동경영주 등록이 늘어난다지만, 여전히 농지소유 또는 임대차계약 명의는 대부분 남성농민 명의로 돼 있어 여성농민은 (농지원부 기록 등을 요구하는) 농협 조합원 등록이나 대의원 출마 등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부부 또는 그에 준한 관계를 맺은 쌍방이 농지 및 농업생산수단의 공유자로 명시돼야 한다는 게 이 조항이 만들어진 이유다.

주요농산물 공공수급제

농민운동 주체들의 오랜 과제 중 하나인 ‘주요농산물 공공수급제’ 실시 내용(제5절 제61조)을 비롯해, 주요농산물에 대해 생산비와 농민 적정소득을 보장할 수 있는 ‘적정가격’ 설정(제62조), 지자체에서 수급안정조치를 취할 시 국가에서 행정적·재정적으로 지원(제63조), 생산자단체의 가격결정 및 농산물 수급조절 과정에 대한 참여 보장(제66조) 등의 내용도 주목된다.

농민수당

주요농산물 공공수급제와 함께 농민 적정소득 보장을 위한 조치로서, 농민기본법안은 제68조에서 ‘농민수당 지급’을 언급한다. 해당 조항에선 “지자체는 (농민이) 농민수당 등의 지급대상인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조례로 정하는 바에 따라 주민자치조직의 결정에 따르도록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농지보전

식량주권의 토대인 농지를 지키기 위한 내용도 농민기본법안에서 빼놓을 수 없다. 제6절 첫머리인 제69조에서부터 “농지는 식량주권 실현을 위해 소유·이용돼야 하며 투기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농업식품기본법에서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던 ‘경자유전’ 원칙의 구체화를 위해, 농민기본법안엔 △자기 농업에 이용하지 않는 자가 소유한 농지를 실경작자 소유로 전환(제70조) △공공농지의 지속적 확대, 청년농민·귀농인 등 실경작농민 대상 농지 우선 임대(제73조) △농지임차인 보호를 위한 법령 제정, 농지소유자의 농지 임대·위탁 시 농지관리청 필히 경유(제74조) △농지 보전·확충을 위한 농지총량관리제 및 우량농지·공공농지 확보 목표 설정(제75조) △타 용도 목적의 농지전용 제한(제76조) 등을 위해 국가·지자체가 정책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농촌보전

제9절 제96조 ‘신·재생에너지 전기사업의 원칙’에선 재생에너지 설비를 농촌에 설치할 시 △해당지역 농업의 지속성 보장 및 농지 보전 △주민 동의 획득 등의 조건을 내걸어, ‘탄소중립’을 명목삼아 무분별한 재생에너지 시설 확대로 농촌을 파괴하는 민간자본의 행태를 규제하고자 했다. 또한 해당 조항은 재생에너지 설비로 인해 피해당하는 주민이 있을 시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하며, 설비 운용으로 수익이 발생할 시 모든 주민이 그 수익을 공평하게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제10절 제102조 ‘폐기물처리시설 설치 제한’ 및 제103조 ‘골재채취 허가 제한’은 농촌에 주민기피시설을 설치할 시 주민 알 권리와 가동중지요청권, 피해배상청구권 등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정책이 수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농민에게 피해 입히는 대외통상 정책, 안 된다

최근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인해 농민에게 악영향을 끼칠 통상환경이 조성된 상황에서, 농민기본법안은 통상정책이 농민에게 피해를 끼치는 방향으로 진행돼선 안 된다고 못 박는다.

제3장 제24조에선 대외통상정책을 세울 시 “식량주권 실현과 식량자급률 제고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농업·농촌에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대외통상 정책 수립 시의 농민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제10절 제115조에선 “정부는 다른 사업의 이익 도모를 위해 농업부문에 부담을 전가하는 통상정책을 수립해선 안 된다”고 명시했다.

먹거리문제는 ‘먹거리기본법’에서

농민기본법에서 전반적인 식품 관련 내용이 사라진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을 테다. 이와 관련해 오순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위원장은 “식품 관련 내용은 현재 전여농도 동참 중인 전국먹거리연대 등 먹거리운동 주체들이 먹거리의 건강성·공공성을 위해 제정 노력을 기울이는 ‘먹거리기본법’에서 포괄하고자 하기에, 농민기본법에선 먹거리 전반에 대한 내용, 즉 식품산업 전반이나 식생활 등에 대한 내용은 제외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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