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김태형 기자]
바람 한 점 없이 봄기운이 가득했던 지난 12일 경북 포항여객선터미널. 해 질 무렵 여객선 썬라이즈호가 항구에 닻을 내리자 짐을 바리바리 짊어진 한 무리가 내렸다.
이들은 ‘영세어민 죽이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결사반대’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깊은 주름, 뭉툭한 손. 이들은 평생 울릉도에서 오징어를 잡아 온 어민들이었다.
이들은 다음날 서울에서 열리는 CPTPP 가입 반대를 위한 집회에 참여하려고 이날 육지로 나왔다. 부경대학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이 초대형 자유무역협정(FTA)인 CPTPP에 가입하면 수산물 수입이 증가해 국내 수산업 분야는 15년간 연평균 69억원에서 724억원의 생산이 감소될 것으로 예측했다.
일본산 수산물 우회수입으로 인해 우리 먹거리에 대한 안전 우려가 확산될 경우 국내 수산물 소비가 위축돼 이로 인한 생산피해도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뉴질랜드, 베트남산 오징어 수입으로 인한 영향도 불가피하다.
어민들은 그중에서도 면세유 등 수산보조금 지급 중단을 가장 우려한다. 해양수산부 관계자의 말과 공청회 자료를 종합해보면 관련 규정에는 과잉 어획하는 어종을 장려하는 수산보조금 지급에 대해 관리를 강화하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CPTPP 가입을 신청하고 협상하는 과정에서 ‘과잉 어획되는 어종은 무엇인지’, ‘이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행위는 무엇인지’에 대한 CPTPP 협상국 간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협상에 따라 국내 어획량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오징어를 잡는 어민에게 수산보조금 지급이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번 일정을 총괄한 김해수 전국오징어채낚기실무자 울릉어업인총연합회장은 “우리 생존이 달린 일이기 때문에 생업을 접고 나왔다”고 말했다. 집회가 열리는 서울 여의도공원 광장까지 여객선 10시간 15분, 버스 8시간 40분 순수 이동 시간만 총 19시간에 달하는 2박 3일간 일정이었다.
이들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미리 준비된 봉고차와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10여분을 달려 인근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이날 밥상 대화 주제는 단연 CPTPP 가입으로 우려되는 어민의 피해였다. 서해원(62)씨는 휴대전화를 꺼내 ‘CPTPP 공청회’에 참석한 본인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당시 참석한 농어민들이 강하게 반발해 공청회를 무산시켰는데, 정부는 공청회가 성사됐다고 주장한다며 분노했다.
서씨는 또 “200L 기준 17~18만원 하던 어업용 면세유 가격이 최근 23만원까지 올랐다”며 “안 그래도 기름값이 많이 올랐는데, 면세유 지원이 끊기면 어민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어민들은 식사를 마친 뒤 하룻밤 머물 숙소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때 오징어 120축(2,400마리)도 잡았지. 한 배에 다 못 실으니까 두 배에 나눠 싣고, 잠깐 집에서 밥묵고 나와서 또 잡고 그랬어.”
이연길(69)씨는 국민학교를 막 졸업한 14살이 되던 해 처음 오징어 배를 탔다. 소형 목선인 ‘강꼬’를 타고 노를 저어 가며 오징어를 잡았다. 석유등으로 물을 비추면 오징어가 보였다. ‘사도’라는 장비로 시루질하면 오징어가 ‘팍’ 달려들었다. 말 그대로 물 반 오징어 반이었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옛날 생각에 잠겨 잠시 웃어 보이던 이씨는 이내 보조금이 끊겨 어민들이 어업을 포기하면 오징어는커녕 울릉도에서 사람이 다 떠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조태복(65)씨는 18살 무렵 오징어잡이 배 선원을 구한다는 소식에 곧장 자원했다. 당장 먹고살 게 없었던 그는 부모 따라 농사짓는 것보다는 벌이가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고된 바닷일에도 빚만 쌓이고 몸도 성치 않았다. 그는 10년 전 서울 경희대학교병원에서 허리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먹고 살려고’ 또 바다에 나갔다. 3개월 전 다시 병원을 찾아 수술을 한 번 더 했다. 허리에 핀이 4개 박혀 있는 그는 평상시 지팡이 없이는 잘 걷지 못한다. 그는 “좀 더 벌어야 하는데 아이고 참”이라며 정부의 일방적인 CPTPP 가입 추진을 우려했다.
이튿날 오전 6시 50분, 인근 식당에서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친 어민들은 서울로 가는 31인승 버스 두 대에 탑승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버스가 북천안IC에 접어들자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야 앞에 스크류 물 끓는 거 봐라.” 앞서가던 버스가 빗길에 물보라를 일으키는 모습을 선박 스크류에 빗댄 것이다. 영락없는 뱃사람들의 대화 주제는 집회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CPTPP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민주당이 하는 게 맨날 밀어붙이기 아이가. 우리가 올라가서 씨부린다고 되겠나”라면서도 “그래도 안 떠들면 그냥 넘어가니까 가야지”라고 말했다.
“땀 흘려 또 일해도 어민들만 다 죽는다. 더 이상 죽을 순 없어 이제는 싸운다. 가자 전국 어민들 생존권 지켜나가자.” 집회에서 따라부를 ‘어민의 노래’를 연습하던 정석균(61)씨는 “보통 오징어는 1월 말이나 늦으면 2월 중순까지도 잡는데, 작년에는 11월 초에 오징어잡이가 스톱 됐다. 이런 경우는 울릉도 역사 이래 처음이다”며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울릉군에 따르면 지난해 울릉군 오징어 어획량은 616톤으로 전년도(1,171톤)에 견줘 반토막 났다.
버스는 오후 1시쯤 서울 여의도공원 광장에 도착했다. 울릉도 어민들은 ‘CPTPP 반대’라고 적힌 빨간 머리띠를 서로의 이마에 질끈 묶어주고 미리 준비한 현수막을 펼쳤다. 이들은 오후 2시쯤부터 한 시간여 정도 열린 집회에 끝까지 자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 울릉도에 나설 채비를 하던 김철남(65)씨는 “어민들의 단결된 모습을 보니까 좋았다”며 “앞으로도 계속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