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된 농작물 재해, 누가 책임지나

  • 입력 2021.11.01 00: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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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배추밭 3,000평이 병해로 초토화됐다. 지난달 27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운교리의 한 배추밭에서 장영철(78)씨가 수확을 포기하고 두둑을 덮고 있던 비닐을 걷어내자 뿌리가 썩어버린 배추가 같이 뽑히고 있다. 장씨는 “30년 농사를 지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말을 아꼈다.한승호 기자
배추밭 3,000평이 병해로 초토화됐다. 지난달 27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운교리의 한 배추밭에서 장영철(78)씨가 수확을 포기하고 두둑을 덮고 있던 비닐을 걷어내자 뿌리가 썩어버린 배추가 같이 뽑히고 있다. 장씨는 “30년 농사를 지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말을 아꼈다. 한승호 기자

최근 유명 햄버거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양상추 없는 햄버거’가 등장해 화제다. 10월 때 아닌 한파로 양상추 작황이 붕괴되자 그 최대 수요처 중 하나인 햄버거 업체가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양상추를 넣고 있는 경쟁업체들도 앞으로를 장담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마트·편의점의 샐러드 상품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소비지의 상황이 이쯤 되면 산지 상황은 생지옥이다. 강원 영서 준고랭지 지역은 영상 10℃ 이상이었던 일 최저기온이 지난달 16일 영하 7℃로 떨어지면서 하루만에 대규모 냉해를 입었다. 배추·무 등 다른 작목들도 피해가 크지만 조직이 연하고 잎이 얇은 양상추는 바람을 막아주는 지형조건이 없는 이상 전멸이라 봐도 무방하다.

아랫녘이라고 안전지대가 아니다. 영호남을 불문하고 광범위한 피해가 감지되며 남해안 끝자락인 전남 장흥·해남조차 무사하지 못했다. 생강 같은 뿌리채소의 경우 잎·줄기가 얼어죽고 요행히 뿌리가 살아남았는데, 썩기 전에 조기수확을 하려 해도 코로나19 인력난에 부딪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실정이다.

비단 냉해만이 아니다. 8월부터 이어진 지독한 가을장마는 농작물 질병 확산의 기폭제가 됐다. 전북과 충북 등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많게는 지역 생산량의 70% 가까운 벼가 병충해를 입었으며, 추석을 전후해 전국의 가을배추가 맹렬한 기세의 바이러스·무름병으로 쓰러져갔다. 냉해를 입은 배추는 언 잎을 떼내고 절임배추나 쌈배추로라도 판매할 수 있지만, 병해를 입은 배추는 뿌리가 썩어 이파리 한 장도 쓸 수 없다. 특히 충북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배추밭은 강원도 양상추밭에 뒤지지 않는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엔 우박으로 인해 안성·강릉·제천 등에 국지적 피해가 나타났다. 국지적이라고 하지만 피해지역 입장에선 지역 전체의 농업이 쑥대밭이 된 비상상황이다. 특히 지난달 1일 골프공 만한 우박이 쏟아진 경기 안성의 피해가 심각한데, 벼·배추·무·양배추·대파·콩·깨·배 등 모든 작목이 망연자실한 상태며 피해 범위는 4개 면에 달한다.

임계점에 달한 환경문제는 기후를 쥐어흔들고 있다. 기후에 매달려 사는 농민들은 그 영향을 정통으로 받는다. 폭염·한파·가뭄·장마·태풍·우박 등 계절에 따라 자연재해는 이미 정례화됐다. 빈도 뿐만 아니라 2018년 ‘40일 폭염’, 2019년 ‘가을철 3연속 태풍’과 지난해 ‘대홍수’ 사태 등으로 볼 수 있듯 계절과 전혀 동떨어진 피해가 닥치거나 그 정도가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는 일도 흔하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언론보도에선 “관측사상 최초”라는 말이 일상화됐으며 “농사경력 몇십 년 만에 처음”이라는 농민들의 탄식도 매년 경신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의 눈길은 산지가 아닌 소비지로 쏠려 있다. 농업 재해대책은 허망하리만치 텅 비어있고 민간 재해보험조차 허망하리만치 실효가 없는데, 배추 가격이 1,000원 오르면 큰일날 것처럼 가격을 낮추는 데만 모든 역량을 쏟는다.

농산물이 재해로 무너지면 소비자는 전체 생활비 중 식비에서, 그중에서도 특정 품목의 구매비용만이 늘어나며 더욱이 작기 전환에 따라 불과 몇 개월 안에 저절로 정상화된다. 하지만 그 품목을 재배하는 농민들은 당장 1년 생계 자체에 차질을 빚는다. 조금만 이치를 따져 보면 정책이 바라봐야 할 곳은 당연히 소비지가 아니라 산지다.

자연재해는 공공의 책임이고 공공의 피해지만, 농업분야에선 그 손실을 전적으로 농민 개인이 감당하고 있다. 몇 년에 한두 번이던 대규모 자연재해가 1년에도 너댓 번씩 찾아오는 기후위기의 시대, 정부 대책 없이 과연 농업은 존속될 수 있을까. 이토록 무책임한 정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농민들에게도, 국민들에게도 자연재해보다 훨씬 큰 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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