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떼버린 정부 … 농작물 재해는 ‘무정부상태’

지자체는 편성된 예산도 없고

정부는 농약대·대파비만 찔끔

보험은 농민 상대 장사 혈안

  • 입력 2021.11.01 00: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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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추석을 전후해 대규모 농작물 재해가 속출했다. 병충해에 나락 알곡이 급감한 전북 부안의 논. 한승호 기자
추석을 전후해 대규모 농작물 재해가 속출했다. 병충해에 나락 알곡이 급감한 전북 부안의 논. 한승호 기자

자연재해를 입은 농민들의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하는 건 피해를 구제받을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부 재해대책과 민간(농협) 재해보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모두 실효성이 없어, 농민들이 자연재해에 맨몸으로 노출돼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올해 추석을 전후해 발생한 병충해·우박피해·냉해 등은 밭이나 작물의 일부가 상하는 정도가 아닌, 전파(全破) 수준의 피해를 양산했다. 농민 입장에선 한 해 소득이 없어진 건 둘째치고 종묘·비료·농약·토지임차료 등 빚을 내 가며 투입한 수천만원의 생산비를 하나도 건질 수 없는 심각한 적자 상황이다.

하지만 행정의 조치는 매우 미적지근하다. 당장 피해지역을 관할하는 지자체들엔 기초·광역을 불문하고 농작물 재해에 대비하는 예산이나 기금 자체가 편성돼 있지 않다. 예비비에 여유가 있는 지자체라면 부족하나마 지원을 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지자체는 정부만 바라보는 실정이며, 피해지역으로부터 물리적·심리적 거리가 먼 정부의 대책은 당연히 굼뜨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바이러스·무름병에 몽땅 망가진 충북 청주의 배추밭에서 농민이 뿌리부터 썩어버린 배추를 들어 보이고 있다.
바이러스·무름병에 몽땅 망가진 충북 청주의 배추밭에서 농민이 뿌리부터 썩어버린 배추를 들어 보이고 있다.

힘들게 정부 지원이 결정된다 해도 기대할 건 없다.「농어업재해대책법」상 정부와 지자체가 재해에 지원할 수 있는 건 피해 종류에 따라 농약·비료와 대파비·복구비 정도뿐, 작물 자체의 피해나 지금까지의 투입비용을 지원할 수는 없다. 1,000만원 단위의 피해에 10만~100만원 단위의 보상이 이뤄지는 것이다.

비교적 지원이 빨리 결정된 안성 우박 피해지역의 경우 총 피해액이 82억원 이상으로 추정됨에도 정부의 농약대 지원액이 겨우 17억원이다. 안성시가 예비비 10억~20억원을 활용해 추가 지원을 준비하고 있지만 정부와 같은 항목에 중복지원할 수가 없어 시설복구비만 지원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지금과 같은 전파(全破) 상태라면 농약대 지원도 사후약방문 격이다. 강원 횡성의 정관교씨(배추 냉해)는 “몇 년 전 브로콜리에 우박이 내려 다 망가졌을 때 정부에서 영양제 지원이 나오는 걸 보고 어이가 없었다. 그걸 주면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건가”라며 혀를 찼다.

심각한 우박 피해를 입은 경기 안성의 무밭. 이 밭은 계약재배 농협으로부터 피해 100% 소견을 받았다.
심각한 우박 피해를 입은 경기 안성의 무밭. 이 밭은 계약재배 농협으로부터 피해 100% 소견을 받았다.

제대로 된 대책이 없다면 차선은 보험이다. 정부도 농작물 자체의 피해보상은 보험의 영역으로 치부하며 실질적인 재해대책을 민간 보험에 내맡기는 정책을 펴왔다. 하지만 보험도 실효성이 없긴 매한가지다.

우선, 농업재해보험이 계속 대상품목을 확대해가고 있다지만 여전히 비대상 품목이 많다. 이번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가을배추·가을무와 양상추 등은 애당초 보험 가입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가입을 했다 해도 문제가 많다. 피보험자의 과실이나 책임이 없는 순수 재해에 대한 보험임에도 20%의 보험료 자부담이 있고, 보험금을 수령하면 할증까지 붙는다. 손해평가사의 방어적인 피해율 산정 또한 고질적인 논란거리다.

이관호 안성시농민회 사무국장(벼·무 우박피해)은 “올해는 쌀이 풍년이라고 보험 피해율을 산정할 때 기준생산량을 20% 늘려서 잡는다. 자부담 20%에 풍년이라고 20% 칼질하고, 남은 60% 중 피해율을 따져 보험금을 주는 식이다. 이런 계산법이라면 내가 보험사에 도로 돈을 물어줘야 할 판”이라며 쓴웃음지었다.

10월 중순 갑작스런 한파에 쑥대밭이 된 강원 횡성의 양상추밭.
10월 중순 갑작스런 한파에 쑥대밭이 된 강원 횡성의 양상추밭.

「농어업재해대책법」은 정부·지자체의 재해 책임을 최소한으로 제한해버렸고 그 빈틈을 메워야 할 농업재해보험은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부실한 정책 실태에 끊임없이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정부도, 국회도 손을 놓다시피 하고 있다.

강원 횡성의 한석신씨(양상추 냉해)는 “정부가 재해 대책을 농협에 미뤄버렸고 농협은 그걸 이용해 자기들 배만 불리려 하고 있다. 농민들만 점점 사는 게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충북 청주의 신창수씨(배추 병해)는 “망가진 배추 값을 온전히 보상받는 건 생각지도 않는다. 투입한 생산비만이라도 보전받을 길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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