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이게 병 걸린 거야. 하얗게 된 거. 올해는 여기도 저기도 이렇게 병에 다 걸렸다는 거야. 안에 보면 쌀이 아무것도 없어. 쭈댕이(쭉정이)야. 속에 봐. 밑에서부터 다 죽어버렸잖아. 내 논도 그런데 종자가 다른 건 안 걸렸어. 신동진만. 이건 농협에서 가격이 틀려. 그래서 전라북도는 많이 해.”
지난 8일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 삼간리의 한 들녘. 이웃 줄포면에서 안타까운 마음에 찾아온 김영철·이진석 농민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망가져 버린 이삭을 손에 쥔 채 설명했다. 그들 눈앞에선 로터리를 단 트랙터 세 대가 신동진 품종의 벼가 심긴 논 1,200평을 흔적도 없이 밀어버리고 있었다. 병충해가 번진 논 곳곳에는 알곡 없이 하얗게 새어버린 이삭이 무성했다.
이 지역엔 논에 침수를 일으킬 정도의 집중호우가 없었다. 가을 태풍이 하필 비좁은 서해안으로 들어와선 벼를 수없이 넘어뜨렸던 것도 아니다. 잦은 가을비가 불안하긴 했지만, 농민들은 설마 멀쩡히 서서 잘 여문 벼에 나락이 달리지 않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뭄·홍수·태풍과 같이 우리가 통상 ‘재해’라고 칭하는 강력한 기상이변을 동반하지 않아도 언제건 토대 굳건한 벼농사조차 망가뜨릴 수 있는 기후위기, 불행하게도 전북 농민들은 그것이 정말 현실로 다가왔음을 체감한 첫 주인공이 됐다.
우리 농정은 정책 수립에 있어 통계청이 생산하는 자료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청은 전북 지역의 쌀 생산량이 지난해 대비 7.8%나 오를 것이라 예상했다. 안타깝게도 이 결과는 이미 전북 곳곳의 벼들이 한참은 잘못돼 가고 있었을 시점인 지난 9월 중순경 실시한 조사에 기인한 것이다. 전국을 통틀어 고작 6,300개 구역을 표본 삼아 당시의 낟알 무게만을 살펴 생산량을 가늠하는 이 조사는 지난해 이미 과녁의 중앙을 크게 빗나간 결과물을 내놓아 농민들의 원성을 산 바 있다. 올해 또한 전북 전역에 걸쳐 이토록 대규모로 일어날 피해조차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며 그 한계를 드러냈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기후위기 대응이 불가능한 기존의 쌀 생산량 예측 통계가 당장 수확기 쌀 수급대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통계청은 최소 22만톤 이상이 초과 생산되는 ‘풍년’을 예상했다. 쌀 목표가격이 사라진 지금으로선 초과생산분에 대한 자동시장격리제 발동이 결정돼야 마땅한 상황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농정당국은 전혀 과잉생산을 대하는 표정이 아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전북 지역의 막대한 피해를 구실 삼아 정확한 생산량을 예측하기 어렵다며 결정을 한 달 뒤로 미뤄버렸다. 변동직불제를 대신해 농가소득을 보호할 것이라며 정부가 자신 있게 마련한 이 장치는, 작동 여부를 결정짓는 바로미터의 고장을 알고도 방치한 탓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상황을 맞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