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깃밥,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 입력 2020.07.26 18:00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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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사진 한승호 기자]

“모든 식당의 즉석솥밥 판매를 금지하고, 공기밥만을 판매한다.”

식량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1970년대, 정부는 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다수확 품종을 개발하는 한편 쌀 소비 감소를 유도하기 위해 다각도로 접근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쌀로 만든 음식을 판매하지 못하게 한 ‘무미일’에 이어, 더욱 강력하게 쌀 소비를 제한한 이 행정명령(1974년 12월 4일)은 향후 모든 식당의 밥상 풍경을 크게 바꾸게 된다.

양곡관리법에 의거한 이 지침은 그때까지 주로 9분도로 도정되던 쌀을 무조건 7분도 이하로 도정해 유통하게 했다. 쌀은 현미 상태에서 겉껍질을 얼마나 벗겨내느냐에 따라 도정의 정도를 구분하는데, 말하자면 가능한 최대한 껍질을 덜 벗겨내 부피를 늘려 밥 한 그릇에 들어가는 쌀알의 수를 최대한 줄여보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한편 이를 공급받는 식당에서는 이 7분도의 쌀에다 30%의 잡곡을 섞는 한편, ‘공기’에만 밥을 담아낼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어기면 판매 허가를 취소하거나 6개월 이하의 영업정지 조치를 취했다.

우리가 주식인 쌀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된 시기는 불과 약 30년 전쯤이다. 대식을 사랑했던 우리 민족은 부족한 쌀 사정에도 불구하고 늘 큰 밥그릇을 놓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500~600g 수준의 밥을 담아내는 거대한 밥그릇을 사용했는데, 이조차도 조상들이 쓰던 것(주발)에 비하면 매우 작은 수준이었다. 외식으로 한정되긴 했으나 그 식문화를 단번에 바꿔버렸으니 대중에 쉽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그래서인지 1976년에는 더욱 강력한 조치가 나온다. 가장 큰 도시인 서울에서 밥그릇의 크기를 규격화하고 이를 강제한 것이다. 이때 정한 공기의 규격은 지름이 10.5cm에 높이가 6cm로, 그나마도 담을 수 있는 용량은 5분의 4로 제한됐다. 다만 손님이 원할 경우 반그릇을 더 주도록 했다.

이 조치는 198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됐는데 식당들은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1981년 매일경제가 낸 기사 ‘외면 당하는 공기밥’에서는 “현행 밥그릇을 사용해도 밥을 남기는 사람이 거의 없고 오히려 양이 적다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쌀 절약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운 반면 두 번씩 날라야하므로 일손이 번거로와지고 새 그릇을 장만하려면 비용도 적지 않게 들어 지시를 따르기가 곤란하다”라는 식당들의 입장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강제한 결과 ‘공기’는 밥의 양을 재는 표준 단위로 자리 잡았고, 한 끼에 먹는 정량을 ‘흰쌀밥 한 공기’로 인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우리는 쌀의 과잉생산을 염려하게 된 지 오래다. 1인당 쌀 소비는 당시의 절반 수준으로 대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스테인리스제 공기는 관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획일적 쌀 소비를 유도했던 ‘공깃밥’을 탈피해보면 어떨까. 밥그릇의 크기로 쌀의 소비를 억눌렀던 전례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그 반대의 시도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한국농정>의 제안을 소개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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