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밥을 아시나요?

‘밥심’으로 일궈온 한민족 역사 … 쌀밥 가치 재조명 필요

  • 입력 2020.07.26 18:00
  • 수정 2020.07.26 20:45
  • 기자명 박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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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박경철 기자]

조선 후기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중 하나인 새참. 그림에 나온 당시 밥그릇은 조선시대 사람의 식사량이 많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중 하나인 새참. 그림에 나온 당시 밥그릇은 조선시대 사람의 식사량이 많았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사람들은 명랑한 성격을 지닌 엄청난 대식가들이다.”

17세기 조선에 오게 된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이 <하멜표류기>를 통해 남긴 말이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 등 서양인들은 한민족의 밥상을 보고 놀라곤 했다. 밥그릇의 크기와 그 안에 담긴 밥의 양이 어마어마해서다. 이른바 고봉밥이다. 고봉밥은 밥그릇에 산처럼 쌓아올린 밥을 뜻한다. 현재 쓰이고 있는 스테인리스 공깃밥이 200g 남짓이지만 삼국시대 고구려는 1,300g, 고려시대 1,040g, 조선시대 690g이 들어가는 밥그릇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엔 벼농사 중심의 생활이 이뤄지던 시대라 가축 등이 부족했고, 주곡인 쌀을 통해 단백질을 보충하다보니 서양인의 눈에 대식가로 비춰질 만큼 고봉밥이 일반적인 식사형태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기록된 <쇄미록>에는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적혀 있다. 당시 7홉은 420g 정도로 현재 공깃밥의 2배다.

식사량은 지위를 나타내기도 했다. 왕이나 양반네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밥상이 차려졌고, 평민들은 보릿고개를 견뎌내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면 더 먹어야 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식가였던 셈이다.

이외에도 한민족이 대식가라는 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농경사회다 보니 일이 힘들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많이 먹었다는 설과 탐관오리들에게 수탈을 당할 바에야 먹어치우겠다는 생각으로 식사를 하다 보니 식사량이 많아졌다는 얘기도 있다.

이에 더해 우리나라의 쌀은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보다 맛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주변국 보다 한민족의 덩치가 컸고, 대식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는 설도 있다.

특히 1998년 충북 청주 소로리에서 발견된 볍씨는 1만3,000년 전 것으로 입증되며 벼의 기원이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일 수 있고, 삼국시대가 아닌 신석기시대부터 벼 농사를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쌀밥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 민족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새 쌀밥은 찬밥 신세가 됐다. 먹을거리가 넘쳐나서일 수도 있고, 영향학적으로 봐도 꼭 쌀밥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서일 수도 있다. 문제는 ‘밥심’으로 일궈온 우리 민족의 역사에 비춰보면 쌀밥의 가치가 터무니없이 저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밥은 먹었나, 언제 밥 한 끼 먹자’는 말로 일상적 인사를 할 정도로 쌀밥은 우리네 일상이다. 쌀의 가치를 곱씹어봐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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