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의 품격’ 깎아내린 박정희정부의 혼·분식 장려 운동

무미일, 잡곡밥·밀가루 장려
20년도 안 돼 역효과 여실

  • 입력 2020.07.26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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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하얀 국수가락 맛좋은 빵의/ 고소한 잡곡밥 그 맛을 알면/ 해와 같은 밝은 마음 튼튼한 육체/ 우리도 넉넉히 살 수 있어요/ 쑥쑥 키가 큰다 힘이 오른다/ 혼식 분식에 약한 몸 없다 …

1970년대 학생들 사이에 교가처럼 불렸던 <즐거운 혼식 분식>이다. 밀가루와 잡곡의 영양을 홍보한 글 같지만 실제론 쌀 소비를 억제하기 위한 캠페인의 성격을 띤다. 박정희정부의 쌀 소비감축 정책은 스테인리스 공깃밥 외에도 국민 생활 전반에 깊숙이 손길을 미쳤다.

1960~1970년대는 베이비붐·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며 쌀이 비교적 귀해졌던 시기다. 정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식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혼·분식 장려 운동을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무미일(無米日)이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말 그대로 ‘쌀 없는 날’로 지정, 모든 음식점에서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한 것이다. 무미일뿐 아니라 평시에도 음식점들의 잡곡밥(잡곡 함량 20~30%) 판매를 유도했으며 설렁탕 등에는 반드시 소면을 넣게 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잡곡밥 취식을 장려하고 학교에선 교사들이 쌀밥 도시락을 ‘단속’하며 적극적인 감시에 나섰으며, 쌀을 이용한 가정 내 술 제조를 금지함으로써 일제강점기 이후 가양전통주의 명맥을 다시 한 번 끊기도 했다.

1973년 식생활 개선을 위한 혼·분식 특별 요리강습이 진행 중이다. 출처: 국가기록원
1973년 식생활 개선을 위한 혼·분식 특별 요리강습이 진행 중이다. 출처: 국가기록원

형식은 운동이지만 그 양상은 강제성이 짙었다. 학교에 쌀밥을 싸 간 학생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교사로부터 ‘너희 집은 그렇게 잘 사냐’는 등의 면박을 받았으며 더러는 체벌도 이뤄졌다. 무미일에 쌀 음식을 판 업소엔 1~6개월의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고 신고자에게 5,000원의 포상금(1970년 짜장면 한 그릇 60원)을 주는 등 대놓고 단속·처벌규정을 만들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이같은 혼·분식 장려 운동은 마치 산아제한 운동과 같이 ‘한 치 앞을 못 내다본’ 정책의 전형이었다. 1960~1970년은 이촌향도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농업의 기계화가 본격화된 시기였다. 후지하라 타츠시 교수가 쓴 <트랙터의 세계사>에 따르면 미국에선 이미 20세기 초반에 트랙터 보급이 보편화됐으며 일본에서도 우리나라 ‘무미일’ 시행 1년 전인 1968년 벼농사 기계화 일관체계가 구축됐다. 선진국과 보폭을 맞추는 데는 실패했다 치더라도, 주변을 조금만 둘러봤다면 대대적인 쌀 증산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1972년부터 4년 사이에 경운기 공급대수가 20배 증가하는 등 농업의 기계화가 가속됐고 1980~1990년대에 벼농사 기계화 일관체계가 완성됐다. 하지만 농민들은 1970년대 이전까진 혼·분식 장려의 저곡가 정책으로, 1980년대 이후엔 급격히 줄어든 수요와 늘어난 생산으로 숨 돌릴 틈 없이 고난의 세월을 걸어오고 있다.

혼·분식 장려 운동은 국내 재배작물 다양화에도 전혀 기능을 하지 못했다. 식량자급을 염두에 두지 않은 막연한 혼·분식 장려는 수입 밀가루·곡물에의 국민 식생활 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만을 낳으면서 오늘날까지 오히려 농민 생존과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식문화가 급속도로 다양화된 오늘날의 쌀 소비 감소 현상을 박정희정부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쌀 중심의 식문화 쇠퇴와 쌀을 천하게 대하는 오늘날의 인식에 혼·분식 장려 운동의 영향이 중대한 지반이 됐음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 잔재가 ‘스테인리스 공깃밥’이라는 문화를 통해 상징적으로 남아있다. 쌀 문제가 우리 농업 문제 전반에 있어 중차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농민들이 아직도 처절하게 ‘밥 한 공기 300원’ 보장을 부르짖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뼈아픈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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