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명이 부르짖은 농민수당, 47명 손가락에 꺾이다
4만명이 부르짖은 농민수당, 47명 손가락에 꺾이다
  • 권순창 기자
  • 승인 2019.10.20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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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농민수당, 4만여 농민 주민발의 불구
전남도, 핵심조항 훼손한 별도 발의 진행
전남도의원 47명, 전남도 손 들어주고 ‘땅땅땅’

[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지난달 30일 전남 무안군 전남도의회 앞에서 열린 '도민 무시, 민주주의 파괴 전남도의회 규탄과 도의회 방청권 발부 촉구 도민대회'에서 농민들이 도의회를 규탄하는 상여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이날 전남도의회는 청사를 봉쇄한 뒤 도민 4만3,000여명이 서명한 주민조례안 대신 전남도가 제출한 ‘농어민 공익수당’안을 통과시켰다. 한승호 기자
지난달 30일 전남 무안군 전남도의회 앞에서 열린 '도민 무시, 민주주의 파괴 전남도의회 규탄과 도의회 방청권 발부 촉구 도민대회'에서 농민들이 도의회를 규탄하는 상여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이날 전남도의회는 청사를 봉쇄한 뒤 도민 4만3,000여명이 서명한 주민조례안 대신 전남도가 제출한 ‘농어민 공익수당’안을 통과시켰다. 한승호 기자

광역자치단체 최초의 농민수당 지원조례를 주민발의한 전남 농민들의 사례가 관계자들의 깊은 탄식을 자아내고 있다. 아무리 많은 주민들의 뜻을 모은들 행정과 의회가 이를 너무나 쉽게 덮어버릴 수 있다는, 주민조례청구제의 치명적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전남지역 농민들은 올해 전남 농민수당 지원조례 주민발의에 뛰어들었다. 피폐한 농업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스스로 나선 것이다. 지난 5월 30일 조례청구 교부신청을 한 뒤 승인이 떨어진 6월 15일부터 불과 45일 동안 4만3,151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최소 충족조건인 1만5,763명의 3배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문제는 전라남도(지사 김영록)가 별도로 만든 ‘농어민 공익수당’ 지급조례안이 주민발의안과 대치하면서 불거졌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내용을 담은 두 조례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농민수당 지급대상 및 지급액이다. 주민발의안은 모든 농민에게 월 10만원을 균등지급하되 세대당 지급대상이 2인 이상일 경우 금액 축소가 가능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도 발의안은 농업경영체로 등록한 농민만을 대상으로 지급하며 공동경영주는 한 사람만 지급받도록 했다. 금액은 명기하지 않았지만 논의과정에서 월 5만원이 거론된 것으로 전해진다. 공동경영주를 무시하고 농민수당의 취지를 훼손한데다 지급총액이 주민발의안보다 4분의1가량이나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심의위원회 구성이다. 주민발의안은 도측과 농민측이 동수로 위원을 맡는 농민수당 심의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이는 농민수당의 지급대상·지급액·지급시기 등을 심의·의결하는 기구다. 그러나 도 발의안에선 위원 수의 균형을 담보하지 않았음은 물론 위원회 자체를 의결권이 없는 단순 심의기구로 설정했다. 위원회에서 나온 심의결과에 관계없이 도지사가 자의적으로 농민수당에 대한 모든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민발의안에 비해 훨씬 퇴보한 안이지만 전남도의회(의장 이용재)는 도 발의안을 선택했다. 전남도의회는 지난달 30일 농민들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의회 출입문을 닫아건 채 도 발의안을 전면 수용한 ‘대안’을 의결했다. 찬성 47, 반대 3, 기권 2의 결과다. 4만여명의 염원이 47명의 손가락에 꺾인 순간이었다. 주민발의안은 사실상 대안에 아무것도 반영되지 못했지만 ‘대안반영 폐기’의 명목으로 사라졌다.

전남도의회는 그동안 허망하리만치 주민발의안에 무신경했다. 지난달 20일 소관 상임위인 농수산위원회 회의에 상정되기 전까지 의회 내에서 해당 안건에 대한 논의 자체가 전무했다. 농민단체 실무자들이 일부 의원과 이따금 개별적 면담을 가졌을 뿐이다. 행정과 의회가 애초에 입장을 맞추고 움직였다는 의혹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청구인 대표인 문경식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이 20일 당일 농수산위원회 회의에서 의사발언을 했지만 여기서도 의원들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김성일 위원장은 “원래는 도지사 의견 청취만 해도 되는데 주민청구 취지를 듣기 위해 이렇게 시간을 할애했다는 걸 알아달라”고 생색을 내기도 했다.

앞서 지난 7월엔 이보라미 전남도의원(정의당)이 ‘농어민 기본수당’ 지급조례안을 대표발의했다. 주민발의안, 도 발의안과는 또 별개의 안이다. 다행히 이 의원의 조례안은 주민발의안과 내용상 큰 차이가 없었지만, 행정이 아닌 의원들도 언제든지 주민발의를 무력화할 제3의 안을 제시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원리를 생각해볼 때, 민의가 직접 담겨있는 주민발의 조례안은 행정이나 의회 발의안보다 훨씬 더 큰 무게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의회 회기 전까지 유사한 조례를 발의해 병합심리에 부치면 주민발의안을 얼마든지 변질시킬 수 있다. 행정과 의회가 공모할 경우 악용될 가능성이 다분한 맹점이다. 전남의 안타까운 사례는 속속 농민수당 주민발의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타 지역 농민들에게도 시사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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