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고 떨어지고 무너지고 … 제주농업 초토화

  • 입력 2016.10.16 01:51
  • 수정 2016.10.16 01:53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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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태풍이 지나간 지 일주일이나 지났건만 밭의 상태는 여전히 뻘에 가까웠다. 내딛는 발길마다 질척한 흙에 미끄러지고 발자국은 깊게 패였다. 어떤 밭은 채 썰물이 빠져나가지 못한 해안처럼 아직도 빗물이 한가득 괴어 있었다. 태풍을 직격으로 받아낸 제주 서부지역엔, 기자가 찾아간 11일까지도 침수의 흔적이 만연했다.

태풍이 지나간 지 일주일이 경과한 지난 11일, 제주 한림읍의 한 브로콜리밭은 아직도 일부가 물에 잠겨 있다. 한승호 기자

“말도 말아요. 밤새 비바람이 미친 듯 몰아치길래 6시쯤 나가 보니 물이 장난이 아닌거야. 죽자살자 호미질 하고 물 빼봤는데도 지금 상황이 이래요.” 한림지역 양채류 농가들은 아직도 태풍이란 말에 진저리를 쳤다.

질척한 밭과 고인 물은 어찌됐건 마르겠지만 문제는 작물이다. 빗물에 뿌리가 썩어 양배추는 너덜너덜하고 브로콜리는 잔뜩 쪼그라들어 땅에 붙었다. 그나마 살아있는 것들도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나거나 제대로 생장할 수 없는 상태다. 정식이 빨랐던 일부 밭을 제외한 제주 서부 양채류 전반에 피해가 덮쳤으며 밭마다 심하게는 70~80%의 작물이 죽어가고 있다. “3일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날마다 죽어 나가요. 어떻게든 살려보자고 비료를 주고는 있는데, 10~15일 뒤엔 거의 살아있는 게 없을 것 같아요.”

가을 태풍이 특히 무서운 이유는 작물이 죽어도 대파를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지역 밭작물은 늦어도 9월말~10월초엔 정식을 해야 하는데 10월에 태풍이 와버렸으니 대파 기회조차 뺏겨버린 셈이다. 도에서 지원한다는 대파비·농약값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동부지역의 무·당근 농가들도 똑같은 고충을 호소한다. “당근·무는 1년 농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다 망한 거죠. 그나마 지금 대파가 가능한 작물이 유채·보리인데, 이건 녹비작물이지 소득작물이 못 돼요.”

남부의 감귤이라고 무사할 순 없다. 감귤은 특성상 하우스 등 시설피해가 많고 노지 만감류의 경우 낙과 피해도 크다. 바람을 맞아 익는 속도가 느려지고, 서로 부딪혀 썩고, 낙과 후 남은 열매가 비대해지는 2차 피해도 심각하다. 방풍림이 쓰러져 하우스를 덮친 사례도 있고, 하우스 자동개폐기를 닫은 상태에서 전기가 끊겨 열과 피해를 우려하는 농민들도 있다. 재배형태가 다양한 만큼 피해사례도 제각각이다.

태풍으로 틀어진 물길에 제주 한림읍의 밭이 바위와 자갈로 뒤덮였다. 왼쪽 쓰러진 작물이 보이는 곳이 콩밭, 오른쪽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땅이 양배추밭. 한승호 기자

농작물이나 하우스 비닐 피해 정도를 입은 경우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한림읍 명월리엔 사람 몸집만한 크기의 바윗덩어리들이 가득한 1,000평 정도의 ‘공터’가 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 양배추가 빼곡히 심어져 있던 곳이다. 한순간의 비바람에 제 길을 틀어버린 작은 하천은 양배추밭 하나를 집어삼켰다. 농작물은 둘째치고 밭의 복구 자체에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할 판이다.

엿가락처럼 휘어진 창고 건물의 철골과 김밥말이처럼 뽑혀 말려버린 하우스. 성난 자연은 개개인의 농민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안겨줬다. 제주 농민들은 지금, 정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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