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라디오를 제작해서 공산품으로 판매했을까?이런 저런 기록에 의하면 1957년에 에서 라디오를 생산 판매했던 것이 해방 후 첫 국산 라디오의 등장으로 올라있다. 물론 수신기의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 판매한 것이었다. 바로 이어서 이듬해인 1958년에는 가 또한 라디오 생산 업체로 등장했다. 이때의 라디오는 건전지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전기에 꽂아 쓰도록 돼 있는 진공관식 라디오였다.우리에게 ‘전파사’ 관련 얘기들 들려주고 있는 이해중 씨의 경우 중학교 3학년 때이던 1959년에, 그의 집에 바로
1950년대 말, 충청도 부여의 한 자연마을.동네 확성기가 켜지더니 한동안 깨도 볶고 콩도 볶다가 이윽고 이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아, 아, 마이크 시험 중. 아, 아…시방 내 목소리 나오는 것이여? 아, 나온다고? 에…주민 여러분께 본 부락 이장이 한 말씀 알려 드리겄습니다. 지난달에 신청했던 비료가 나왔으니께, 주민 여러분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시방 즉시로 마을회관으로 나와서 비료를 타 가시기 바라겄습니다. 그라고, 그저께 놓았던 쥐약은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치워 주셔야겄습니다. 오늘 아침에 조성남 씨 집 개가 쥐약을
읍내 전파사의 진열창 바깥에 길 가던 사람들이 뭉텅이로 모여서 웅성거린다. 모두는 도로 쪽에 등을 보인 채 전파사의 안쪽을 향해 고개를 빼고 있다. 전파사에서 행인들을 위해 일부러 진열창 밖을 향해 놓아둔 흑백텔레비전을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점차 열기가 달아올라서 어느 결에 웅성거림은 왁자함으로 바뀐다.-어? 타이거 마스크 저 놈, 반칙이야, 반칙!-저거 칼 아니야? 저놈이 뒤에서 흉기를 꺼냈어! 아이고 쓰러지고 말았네.-야, 김일이가 일어났다. 인제 넌 죽었다. 박치기를 해, 박치기!-에이, 갑자기 테레비가 왜 이래! 시방 김일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기공식의 삽을 떴던 과천의 서울대공원이, 전두환 정권 때인 1984년에 완공되었다. 그해에 창경원의 모든 동물들을 서울대공원 내에 조성된 동물원으로 옮겨 수용하였다. 드디어 창경궁은 ‘동물원으로서의 75년의 욕된 세월’을 마감하고 옛 조선 궁궐의 지위를 되찾았다.현재의 서울대공원은 전체면적이 240만 평인데, 그 중에서 88만 평을 동물원이 차지하고 있다. 옛 창경원 시절에 비하면 엄청난 면적이다. 그런데 애당초 계획했던 동물원 부지가 그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규모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동물박사’ 김정만 씨는 거의 평생을 야생동물들과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유독 호랑이와 인연을 맺는 데에는 곡절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1955년도에 창경원에 들여왔던 호랑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1960년대 초에 금융조합(농협의 전신)에서 벵갈호랑이 암놈 두 마리를 창경원에 기증했다. 녀석들의 이름을 각각 ‘백두’와 ‘금강’으로 지어주었다. 병치레 하지 않고 건강한 편이어서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문제는 발정기인 봄철만 되면 (‘시집 보내주지 않는다고’) 안정을 찾지 못 하고 심히 안달을 한
1960년대에 ‘출세한’ 자식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갔다 온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에게 늘어놓은 첫 번째 자랑거리는 물론 창경원 구경이었다. (‘화신백화점 구경’도 자랑거리이기는 했다.)특히 동물 중에서도 호랑이 등의 맹수를 보고 왔다는 자랑은, 아직 창경원에 안 가본 시골 사람들의 호기심과 부러움을 자극하기에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때 전달자의 화법이 중요하다.-야아, 황소보다 두 배나 큰 호랑이가 천둥소리 같은 포효를 내지르더니, 집채만한 바위를 단숨에 훌쩍 뛰어넘어서 내 앞에서 딱 내려앉아 입을 떠억 벌리는데….어차피 과장과 허풍을
동물 구경을 제외한다면, 나이 든 사람들이 ‘창경원’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밤 벚꽃놀이’다. 그런데 창경원의 벚꽃놀이 행사가 이미 해방되기 20년 전부터 열려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왕년의 창경원 수의사 김정만 씨가 들려주는 벚꽃놀이 행사의 연원은 이러하다.“창경궁의 현판을 창경원으로 바꿔 달고 나서 2년이 지난 1911년에, 일본 놈들이 자기나라의 정신을 조선에 심는다며 창경원에다 대대적으로 벚나무 식목을 했어요. 자그마치 1,800주를 심은 겁니다. 그 나무들이 10년 남짓 자라니까 화사하게 꽃이 필
김정만이 처음 수의사로 부임했을 때, 창경원에는 박영달이라는 나이 많은 사육사가 있었다. 그는 ‘동물원이 생기기 이전의 옛 창경궁’에서 왕실의 마차를 몰던 마부였다. 그런데 조선 왕실에 자동차가 도입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가, 왕실의 주선으로 창경원에 취직을 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비록 동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으나, 창경원의 역사를 한 달음에 꿰고 있던 증인이었다.사무실의 책상서랍이며 서류함 따위를 다 뒤져봤지만 동물의 생태나 질병과 관련된 자료가 전무했으므로(해방 직후에 일본인 원장과 직원들이 모두 소각하
1958년 봄, 김정만이 대학졸업 후 수의사로서 첫 발령을 받은 곳이 바로 창경원이었다.-축하하네. 자네가 서울대 수의학과를 나온 재원이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네. 어이, 이 선생, 김정만 씨 데리고 가서, 오늘 아침에 죽은 백곰 해부 좀 같이 하지.출근 첫날, 김정만은 원장의 지시에 따라서, 병에 걸려 죽은 백곰을 해부하기 위해 선배 수의사인 이영범을 따라나섰는데, 그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이러했다.-그런데 백곰이 왜, 어쩌다 죽었는데요?-오진이야. 헛다리짚은 거지. 작년에도 사자 한 마리가 비실비실하기에, 소화기 장애인 줄 알
아니, 아주 오랫동안 동물원이었다.2001년 여름의 어느 토요일 오후, 모처럼 궁궐 나들이에 나섰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자리한 창경궁.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가서 명정전 앞의 휑한 조정(朝廷)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측면의 숲길로 들어서니, 궁궐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며 걷기에 더할 나위 없는 산책길이 벋어있다. 주말이었음에도 창경궁 숲길은 찾는 이가 많지 않아서, 복작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고적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혼자 혹은 두셋씩 드문드문하게 간격을 두고는 한정 없이 느릿느릿 고궁 오후를 걸었다.내게도 길동무가
1934년 11월 23일. 이 날은 영도 주민들이 섬사람에서 육지 사람으로 바뀌는 날이었다. 역사적인 영도다리의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시 부산 전체의 인구가 15만이었는데, 이 날 행사를 구경하러 각지에서 몰려나온 사람이 줄잡아 6만여 명이었다. 다리의 개통식은 중구 쪽 들머리에서 열렸다.-자, 할아버지 할머니, 하나 둘 셋 하면 가위로 테이프를 딱 자르는 겁니다. 하나, 둘 셋! 부산시장 격인 부산부윤 쓰치야 덴사쿠(土屋傳作)와 나란히 서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김해에서 온 갓 쓴 노인 부
‘하루에 몇 차례씩 시간을 정해놓고 대형 기선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다리의 상판 일부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이런 다리를 도개식 교량이라고 한다.’영도다리 건설을 앞두고 열린 설명회에서 설계 기술자가 그렇게 말한 이후로, 부산에서는 한 동안 ‘도개식(跳開式)’이라는 매우 낯선 한자말이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압록강 철교의 경우 큰 배가 지날 때에는 다리 일부가 옆으로 젖혀지는 회전식 개폐 장치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공중으로 들어 올린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으므로, 배를 부리는 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