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영도다리⑦ 영도다리가 허공에 멈춘 사연은…

  • 입력 2019.11.03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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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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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1월 23일. 이 날은 영도 주민들이 섬사람에서 육지 사람으로 바뀌는 날이었다. 역사적인 영도다리의 개통식을 구경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시 부산 전체의 인구가 15만이었는데, 이 날 행사를 구경하러 각지에서 몰려나온 사람이 줄잡아 6만여 명이었다. 다리의 개통식은 중구 쪽 들머리에서 열렸다.

-자, 할아버지 할머니, 하나 둘 셋 하면 가위로 테이프를 딱 자르는 겁니다. 하나, 둘 셋! 부산시장 격인 부산부윤 쓰치야 덴사쿠(土屋傳作)와 나란히 서서 개통 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김해에서 온 갓 쓴 노인 부부였다. 그 노부부가 맨 앞에서 영도 쪽을 향해 행진하고 벼슬아치들과 소학교 학동들과 일반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참 신기했지요. 나룻배를 타지 않고도 바닷물을 내려다보면서 영도와 뭍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이. 개통하던 그 날은 엿장수 떡장수 과자장수 장난감 장수들이 몰려와서 하루 종일 들썩거렸어요. 가설극장 차려놓고 악극도 하고….”

당시 갓 열 살이었던 영도 토박이 부성수 씨의 회고다.

개통식 날을 전후해서 한동안 부산의 우체국에서는 모든 우편물의 봉투에다 영도다리 모양을 새긴 고무도장을 찍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영도다리의 진면목은 다리의 상판을 들어 올리는 장면이다. 개통식이 있고 며칠이 지나 처음으로 다리를 들어 올리던 날, 시민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금 몰려나왔다. 드디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통행을 막는 차단기가 내려지고 삐그덕 소리와 함께 육중한 다리의 상판이 천천히 공중으로 올라갔다. 너나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개통 초기에는 하루 일곱 차례씩 다리의 상판일부를 들어 올렸지요. 다리가 공중으로 치켜 올라가는 신기한 모습을 구경하려고 전라도 충청도, 그리고 멀리는 서울이나 강원도에서도 일삼아 구경을 왔다니까요. 부산의 명물이 된 것이지요.”

바야흐로 영도다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리가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만 신기해했을 뿐, 다리 준공과 동시에 영도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해안포기지를 비롯한 일제의 군사시설 구축공사에 대해서는 별달리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해방이 되었다. 시민들은 개통식 때 일장기를 들고서 건너던 그 다리를 태극기를 흔들면서 행진하였다. 일부 성급한 시민들은 일제가 구축해 놓은 태종대의 해안포기지로 몰려가서는 쇠붙이를 떼어다가 고물상에 팔기도 했다.

해방 후 좌우익의 극심한 이념대립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던 사실이야 모르는 사람이 드물겠거니와, 부산지방의 대립 양상은 어느 지역보다 극심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는데, 다리가 30도쯤 공중으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딱 멈추더니,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오고 난리가 났어요. 전날 밤에 좌익 청년들이, 들어 올리는 상판 그 부분에다 플래카드를 미리 설치해놓은 거요. 출근길에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다리가 올라가기 시작하니까 플래카드의 구호가 쫙 펼쳐진 거지. 거기 뭐라고 씌어있었냐 하면….”

다리 상판을 허공에 비스듬히 띄운 채로 경찰을 달려오게 만든 플래카드의 구호는 이러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가랑이 밑을 지나는 선박을 위하여 초기에 일곱 번씩 다리를 들어 올리던 영도다리는 이제는 순전히 사람들의 구경거리로만, 하루에 한 번씩 오금을 펴고 다리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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