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창경원⑥ 호랑이 시집가던 날

  • 입력 2019.12.15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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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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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박사’ 김정만 씨는 거의 평생을 야생동물들과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유독 호랑이와 인연을 맺는 데에는 곡절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1955년도에 창경원에 들여왔던 호랑이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1960년대 초에 금융조합(농협의 전신)에서 벵갈호랑이 암놈 두 마리를 창경원에 기증했다. 녀석들의 이름을 각각 ‘백두’와 ‘금강’으로 지어주었다. 병치레 하지 않고 건강한 편이어서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문제는 발정기인 봄철만 되면 (‘시집 보내주지 않는다고’) 안정을 찾지 못 하고 심히 안달을 한다는 점이었다.

1963년 11월에 서커스단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가 당시엔 넓은 공터였는데 그 자리에서 <심상복 서커스단>이 오랫동안 공연을 해왔거든요. 단장인 심상복은 화교(華僑)였는데 흥행에 실패해서 서커스단을 해체할 것이라면서 서커스단이 보유하고 있던 시베리아호랑이 수놈 한 마리를 구입하겠느냐고 묻는 전화였어요. 나중에 원장에게 혼날 셈 치고 사겠다고 대답을 해버렸지요. 600달러였으니까 아주 싸게 구입을 한 겁니다.”

기존의 벵갈호랑이 암놈을 사육하던 바로 옆에다 그 수컷 시베리아호랑이의 우리를 마련해주었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합사시키면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상당기간 동안 나란히 두고 사귈 시간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봄이 되자 암놈이 어김없이 발정기 징후를 나타냈고, 철망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핥아주는 등 호감을 드러냈다. 그만하면 1년 동안의 맞선이 성공적이라 여겼다.

-내일 아침 8시에 합방을 시킬 테니까 사육사들은 준비상태 점검하도록!

수의사 김정만이 호랑이의 합방행사를 위해 사육사들에게 지시한 준비물들이 좀 별스러웠다. 최루탄, 횃불, 살아있는 토끼, 그리고 물을 뿌릴 소방호스 따위였으니.

주위가 산만하면 망칠 우려가 있었으므로 인근 동대문 경찰서 출입 기자들에게도 호랑이의 합사 사실을 극비에 부쳤다. 드디어 양쪽 우리의 칸막이가 열렸다. 수의사와 사육사들이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발정 난 암놈이 수놈 주위를 서너 바퀴 맴돌았다. 그러다가 발랑 드러눕는가, 했는데 발톱으로 수놈의 얼굴을 할퀴었다. 그와 동시에 수놈이 암놈의 목덜미를 덥석 물고는 거칠게 끌고 다니는 것이었다. 둘을 떼놓기 위해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고 최루탄을 쏘고 한바탕 난리법석을 치렀으나, 결국 암놈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해부해놓고 보니 암놈은 목뼈가 부러져 있었다. 실패였다.

“후회막급이었지요. 덩치가 큰 시베리아 산 수컷과 체구가 작은 벵갈호랑이를 합사시킨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어요. 그 반대라면 몰라도 ‘덩치 큰 연상의 수놈과 작고 어린 암놈’의 조합은 위험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요.”

나중에 광주에 사직동물원이 생겨서, 당시 광주 출신의 하얏트 호텔 사장이 호랑이 한 쌍을 기증했는데, 그 호랑이를 다른 호랑이와 합사시킬 때, 김정만이 그 ‘성스러운 행사’를 주관했다. 이번엔 대성공이었다. 암놈보다 덩치가 작고 나이도 어린 수놈을 파트너로 짝 지워 준 것이 비결이었다.

“그 이후로 제가 호랑이 번식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됐어요. 정말이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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