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창경원③ 살아있는 호랑이의 뱃속을 구경하다

  • 입력 2019.11.24 18:5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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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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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만이 처음 수의사로 부임했을 때, 창경원에는 박영달이라는 나이 많은 사육사가 있었다. 그는 ‘동물원이 생기기 이전의 옛 창경궁’에서 왕실의 마차를 몰던 마부였다. 그런데 조선 왕실에 자동차가 도입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다가, 왕실의 주선으로 창경원에 취직을 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비록 동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으나, 창경원의 역사를 한 달음에 꿰고 있던 증인이었다.

사무실의 책상서랍이며 서류함 따위를 다 뒤져봤지만 동물의 생태나 질병과 관련된 자료가 전무했으므로(해방 직후에 일본인 원장과 직원들이 모두 소각하고 떠났기 때문에), 신입 수의사 김정만은 일단 박영달을 찾아갔다. 그러나 얻어들을 것이 없었다.

-그래도 영감님은 일제강점기에 유일한 한국인 사육사였으니까, 동물의 질병이나 번식, 뭐 이런 것들을 어깨너머로라도 좀 익혀 뒀을 것 아닙니까?

-내가 1925년에 창경원에 들어왔는데, 조선 사람은 딱 나 혼자였어. 그런데 말이야, 일본인 직원들이 나를 호랑이나 사자나 곰 같은 맹수 우리 쪽에는 접근도 못하게 하는 거야.

-왜요?

-조선 놈이니까, 혹시라도 몰래 맹수 우리를 열어서 호랑이나 사자를 풀어놔 버릴까봐 겁나서 그랬겠지. 그래서 일본 놈들 물러갈 때까지 나는 창경원에서 조류만 담당했어. 새 새끼만 길렀다고. 그리고 해방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6.25 전쟁이 터졌잖아. 피란 갔다 돌아와 보니 그나마 남아 있던 동물들이 모두 폐사하고 앵무새 몇 마리만이 남아 있더라니까.

1954년에 당시의 서울시장 김태선은, 동물원을 제대로 갖춰서 시민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자는 취지 아래, 기업인과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벌였다. 호응이 좋았다. <제일제당>에서 코끼리를 기증하고, <천우사>에서 하마를 기증하는 등 기업인들의 협조가 특히 헌신적이었다. 그리하여 창경원은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창경원의 수의사들이 말만 수의사였지, 맹수들을 관리하거나 질병을 치료해본 경험과 지식이 영 맹탕이었다는 사실이다.

“궁리 끝에 어느 날, 조선시대 왕립도서관이었던 ‘장서각’으로 쳐들어갔지요. 혹시 동물에 관한 자료가 없나 하루 종일 뒤진 끝에, 서가의 먼지구덩이에서 책 한 권을 찾아냈어요. 가죽커버로 된 책이었는데 영문판 <동물의 왕국>(The Animal Kingdom)이었어요. 그래, 요놈하고 한 번 씨름을 해보자, 하고 매달렸지요.”

1964년 5월, 김정만은 일본 농림성 초청을 받아 도쿄로 날아갔다. 야생동물에 대한 무지 때문에, 국민들의 성금으로 들여온 코끼리나 사자, 호랑이 등의 동물이 죽어나가는 사태가 빈발하자, 김정만이 떼를 쓰다시피 해서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김정만이 ‘동물공부’를 하러 들어간 곳은 도쿄의 ‘우에노 동물원’이었다.

“들어가자마자 호랑이 개복수술을 참관했어요. 살아있는 호랑이를 수술한다는 건 국내에선 상상도 못 했으니까 신기할 따름이었지요. 맹수를 먹이로 유인해서 한 쪽으로 몰아넣은 다음에, 자동보정 장치의 핸들을 손으로 돌리면 동물이 꼼짝 못 할 정도로 조여들어요. 그러면 마취주사 놓고 수술을 하는 거지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예산 따가지고 그 장치부터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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