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협 문서, 내가 보면 안 된다고?

  • 입력 2023.07.23 18:00
  • 수정 2023.07.23 21: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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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삽화 박홍규 화백
삽화 박홍규 화백

협동조합은 민주적 조직이다. 조합원 한 명 한 명이 조합의 주인이며 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 조합이 정체성을 유지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운영되기 위해선 조합원들의 꾸준한 감시와 참여가 필수다.

농협은 협동조합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조직이다. 정부가 주도해 설립한 데다 신용사업까지 수행하는 종합농협인지라 지역농협 각각의 경제규모가 기업에 준한다. 자연히 경영이 고도로 전문화됐고 이에 농협 경영은 대개 전문경영인(상임이사)이 도맡고 있다.

오늘날 농협의 정체성 상실 문제는 어쩌면 여기서부터 기인할지도 모른다. 경영이 너무 복잡한 탓에 조합원의 참여가 어려워지고, 조합장·상임이사를 비롯한 소수의 임원들이 경영을 독점하게 된다. 직원들이 독점적 경영권을 가진 조합장·임원만 바라보며 일을 하니 조합원은 뒷전이 된다. 협동조합의 기업화다.

조합원들이 복잡한 농협 경영에 참여하려면 이제는 공부가 필수적이다. 농협 조직 내외에 조합원 역량 강화 교육과정들이 존재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실제 조합 운영 장부와 서류를 살펴보며 흐름을 읽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농협이 조합원에게 쉬이 조합 운영자료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장부와 서류 없이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공부가 끝났다고 해 보자. 이제 본격적으로 조합을 감시하고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역시 조합의 장부와 서류를 살펴보는 게 출발점이다. 마찬가지로 조합이 자료를 내놓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거창한 뭔가가 아니더라도, 가령 출하선급금 지급 규정이나 농산물 판매장부 같은 1차원적 자료를 확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농업협동조합법」상 이사회 회의록, 조합원 명부 등을 열람하려면 소정의 열람료를 내야 하고, 회계장부와 기타 서류 등 좀 더 고도의 자료를 열람하려면 조합원 전체 인원의 100분의 3에게 동의 서명을 받아 제출해야 한다. 일단 이 까다로운 조건을 마주하면서부터 대다수 조합원들은 조합 운영에 참여하는 길을 포기하게 된다.

더러 의지 있는 소수의 조합원들이 기어이 조건을 갖춰 자료를 청구하는 일이 있지만, 대개의 경우 농협은 청구 취지를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자료를 제공하거나 핵심 정보를 교묘하게 숨기는 등의 방법으로 이를 회피한다. 혹은 불명확한 이유로 아예 자료 청구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운영 전반에 문제가 많은 조합일수록 조합원에게 보여주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백성들의 글공부를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조선시대 사대부의 모습이 비친다는 건 과한 비유일까. 하물며 지금은 왕정이 아닌 민주주의 시대다. 협동조합은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민주적인(민주적이어야 하는) 조직이다. 조합의 주인인 조합원이 내 조합의 서류를 보겠다는데, 그것을 가로막는 법 조항과 조합 직원들이 있다면 이야말로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다.

조합의 자료가 조합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된다면 조합장과 임직원들은 머리가 아프겠지만 조합은 감히 부정이나 편법을 행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업무에 조합원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경영 자체가 조합원을 중심에 두고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전술했듯, 어쩌면 이것이 기업화된 농협을 협동조합으로 되돌리는 가장 원초적 과제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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