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거나 또 포기하거나

  • 입력 2023.04.02 18:00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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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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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부여잡고 사자후를 토하듯 호소하는 목소리엔 분노와 설움이 뒤섞였다. 이마엔 ‘농업인력확보하라’ 여덟 글자가 새겨진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채였다.

장면 둘. 검은 비닐을 씌운 밭 두둑 위로 씨감자를 쏟아붓는다. 씨감자엔 손가락 한두 마디 크기로 싹이 돋아나고 뿌리까지 여러 갈래로 자라 있다. 며칠째 감자를 심고 있는 농민은 “이대로 심어 (상품성이) 좋은 감자가 나올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농업인력을 제때 구하지 못해 파종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생긴 일이었다.

‘부지깽이도 일손을 거든다’는 봄철 농번기, 법무부의 미등록 외국인노동자 집중단속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특히, 감자, 고구마, 인삼, 대파 등등 일시에 많은 농업인력이 필요한 농민들일수록 그 분노가 법무부를 넘어 국정 책임자를 정조준하고 있다. “대통령 잘못 뽑아 이 사달이 났다”는 원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최근 외국인노동자 집중단속 지역으로 단속 중단 및 농업인력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까지 열렸던 경기도 여주의 현장 분위기는 더욱 싸늘했다. ‘단속을 우려한 외국인노동자들이 도로와 맞닿아 있는 밭엔 웃돈을 줘도 절대 오지 않는다’, ‘농로 한쪽은 승합차로 막고 한 명은 망을 봐야 일한다’, ‘불법 (외국인노동자) 고용 한 명당 벌금 300만원, 총 3,000만원 부과에 올해 농사 포기’ 등의 소식이 꼬리를 물며 현장의 뒤숭숭함을 대신 전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말한다. 합법적으로 농업인력을 충당할 수 있으면 비합법적인 방법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고. 그러나 대한민국 농업 현실에 미등록 외국인노동자 없이 농업 생산을 지속하는 건 더이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여전히 농업을 ‘3D업종(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처럼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에 생산비는 나날이 상승하고 농산물 가격은 수시로 폭등락하고 농가소득은 수십 년째 1,000만원대에 정체돼있는 현실 속에서 농민들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농사를) 포기하거나 또 (합법을) 포기하거나.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농번기 농업인력 대책도 없이 앞뒤 안 가리고 외국인노동자부터 잡아넣는 정부의 행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아닌 말로 대신 농사를 지어줄 것도 아니면서. “농사는 누가 짓냐”는 한 농민의 절절한 외침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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